(마지혜 경제부 기자) ‘경제 검찰’, ‘재계의 저승사자’.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엔 이런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공정위가 기업이 담합이나 시장지배력 남용 등 불공정한 행위를 하는지를 감시하고 적발해 제재하는 역할을 하다보니 이런 별명을 얻었습니다. 기업에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검찰에 고발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갖고 있어 기업들이 ‘저승사자’라 부를 만 하죠.

이런 공정위를 이끄는 정재찬 공정위원장은 어떤 사람일까요. 공정위의 별명처럼 호된 저승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 위원장은 공연히 어려운 말이나 센 단어로 소위 ‘가오’를 잡는 관료는 아닌 듯합니다. 지난해 12월 취임 이후 지켜봐오니 정 위원장은 오히려 ‘재치있는 비유왕’에 가까워 보입니다. 자칫 너무 딱딱하거나, 당연함을 넘어 뻔할 수 있는 말을 톡톡 튀는 비유로 재미있게 전달할 때가 많거든요.



“심판 혼자 경기장 열심히 뛰어다닌다고 경기가 잘 풀리는 게 아니듯 공정거래 질서 확립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심판도 체력을 키워 선수들을 따라 붙으면서 누가 다른 선수를 주먹으로 가격하는지 이로 깨무는지 잘 감시해야겠죠. 하지만 선수들부터가 자발적으로 페어 플레이를 하려는 생각이 없다면 제대로 된 경기는 불가능합니다. 과거 한국 기업이 내수 시장에만 안주할 때야 사실 약간의 반칙이나 할리우드 액션이 있어도 어느 정도 허용되는 분위기였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그런 ‘꼼수’가 안 통하지 않습니까.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야 합니다.”



이달 초 정 위원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대기업 임원들을 불러모아 간담회를 열었을 때 한 말입니다. 그는 “공정위가 꾸준히 시장 감시와 시정조치 등을 해나가겠지만, 먼저 기업들이 공정 경쟁과 상생을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이 같이 말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해 자칫 ‘공자님 말씀’처럼 들릴 수 있는 당부를 경기장과 심판, 선수, 반칙 등의 비유를 써서 전달한 것이죠.



불공정 하도급을 겪었다며 공정위에 익명으로 제보한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저인망 어선식 조사’를 할 것이라는 비유도 썼습니다. 공정위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불공정 하도급 행위를 신고할 수 있도록 익명제보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는데요. 간담회에서 한 참석자는 “중소기업이 신고를 익명으로 한다 해도 공정위가 신고자의 생산 품목에 대한 조사에 나서면 대기업은 누가 신고한 건지 뻔히 알 수 있게 되는 것 아니냐”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 위원장은 “물론 제보를 받은 그 부품에 대해서만 조사를 하면 신고자가 들통날 것이다. 그 부품을 만드는 업체들 다 뻔하지 않나”라며 우려를 인정하면서 “만약 A 부품에 대한 제보를 받으면 A뿐만 아니라 B, C, D 등을 다 들여다보는 저인망어선식 조사방법을 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제조사가 제보한 것인지 알 수 없도록 조사 대상을 넓혀 초점을 흐리겠다는 계획을 저인망어선에 비유한 것이죠.



정 위원장의 비유는 또 있습니다. “공정위가 올해 업무계획에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건 일종의 잠복근무입니다. 경찰이 도둑을 잡을 때도 사안에 따라 잠복 근무를 하지 않습니까. 공정위가 하는 일에 굳이 ‘경제민주화’라는 모자를 씌워 조사 계획을 밝히면 기업들이 자료를 숨기거나 조작하면서 대비를 합니다. 경제민주화를 강조한 것이 오히려 불공정 거래를 포착하기 좋지 않은 여건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공정위 조사가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방심하고 안심한 기업들을 조사할 때 더 많은 허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말 출입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정 위원장이 한 말입니다. 공정위가 올해 업무계획에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한 번도 담지 않은 건 공정위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버렸단 뜻이냐는 일부 기자들의 질문에 정 위원장은 ‘잠복근무’의 비유를 썼습니다. “경제민주화를 앞에 내세우면 비판은 피할 수 있겠지만 조사의 실효성은 없다”면서요. 잠복근무를 하듯 드러나지 않게 시장을 감시하다가 방심한 기업의 덜미를 잡겠다는 계획을 이 같이 밝힌 것입니다.



정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노대래 전 위원장이 갑작스레 사의를 표명한 뒤 위원장 후보자로 깜짝 내정된 후 본지 기자와 인터뷰할 때부터 비유를 사용해왔습니다. 그는 “검찰고발 결정은 사안과 법 위반 정도에 따라 판단할 문제입니다. 남발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선수가 경기 중 반칙을 했다고 심판이 너무 사소한 일에까지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남발한다면 자칫 경기 흐름이 다 끊겨 경쟁 자체가 제대로 안 이뤄질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검찰고발 결정은 신중히 하겠다는 견해를 드러냈습니다. 정 위원장이 앞으로는 어떤 비유로 공정거래 정책을 설명해나갈까요. 주의깊게 듣다가 조만간 다시 독자 여러분들께 소개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