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규모의 현금 보유량을 자랑하는 미국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 인수합병(M&A)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 기업들이 미국 기업을 사들인 M&A는 금액 기준으로 2750억달러를 기록해 전년보다 100% 늘어났다. 글로벌 M&A 증가세 30%를 훨씬 웃돈다. 이런 추세는 올해도 이어져 2월까지 미 기업이 ‘사냥감’이 된 M&A 규모는 410억달러에 이른다. ‘나홀로 경기회복’과 달러 강세 등으로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하는 미 기업이 외국 기업에 먹히는 이유는 뭘까.

◆美 기업이 외국 기업에 인수되는 이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5일(현지시간) 미 대기업들이 세금 회피를 위해 본사를 이전하려는 목적의 이른바 ‘세금 회피(tax inversion) M&A’가 정부의 새로운 규제로 어려워지자 ‘인수자’가 아니라 ‘피인수자’로 변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제약사 샐릭스 파마슈티컬은 지난해 캐나다 제약회사 밸리언트를 인수하려 했었다. 캐나다 법인세율은 25%로 미국(39.5%·주정부 세금 포함)보다 낮아 합병 후 본사를 캐나다로 옮겨 세금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작년 9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세금회피 M&A에 규제를 가하면서 인수에 실패했다.

샐릭스는 전략을 바꿨다. 밸리언트를 인수하는 게 아니라 밸리언트에 인수됨으로써 본사를 이전하는 역발상 전략이다. 외국 기업이 미국 기업을 인수해 본사를 이전하는 데는 별다른 규제가 없기 때문이다. 밸리언트는 지난달 말 샐릭스를 101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샐릭스는 2013년 실적 기준으로 연간 6000만달러 이상의 세금을 절약할 수 있게 됐다. 마히르 데사이 하버드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M&A에서 세금 문제는 더 이상 부차적인 사항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美 기업 해외 보유 현금 2조1000억달러

미 기업들이 높은 법인세를 피해 해외에 쌓아두고 있는 돈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이 미 대기업 304개사의 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2014년 말 현재 이들 기업의 해외 보유 현금자산은 전년보다 1540억달러(8%) 늘어난 2조1000억달러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구글 등 8개 정보기술(IT)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0%에 이른다. 이들 8대 IT기업은 지난해 현금 690억달러를 쌓았다.

기업별로는 제너럴일렉트릭(GE)이 가장 많은 1190억달러를 해외에 쌓아두고 있고 그 다음은 MS(929억달러), 화이자(740억달러), 애플(697억달러) 순이었다. 지난해 1분기 현재 삼성그룹 계열사의 전체 현금자산 66조원(약 600억달러)보다 많은 금액이다.

미국 기업들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이익금을 본국으로 들여오려면 최대 35%(연방정부 법인세율)의 세금을 내야 한다. 예를 들어 애플의 아일랜드 법인이 이익을 미국으로 송금하려면 현지에서 낸 세금(12.5%·아일랜드의 명목 법인세율)과 미 법인세율과의 차이인 22.5%를 추가로 내야 한다. 애플 등 업계는 미 정부가 세율을 내리기 전에는 해외의 현금을 가져올 수 없다며 세율 인하를 요구해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초 국정연설에서 이미 쌓아놓은 현금을 가져올 때 일회적으로 14%, 향후 벌어들이는 이익에 대해서는 19%의 세율을 적용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일회성 세율을 8%로 더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앞으로 의회의 논의 과정이 주목된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