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라이프] 이유일 쌍용차 사장 "회사가 돈 벌어야 희망퇴직자 돌아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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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오피스 - 24일 대표직 내려놓는 이유일 쌍용차 사장
6년간 고군분투…'부활의 싹' 키우고 勇退
인연 없던 쌍용차 구원투수로
연봉 3분의 1로 줄었지만 "마지막 불꽃 태워보자" 결심
옥쇄파업 노조 끌어안은 진정성
기업 회생시키려 야전침대 놓고 77일간 숙식하며 勞組와 협상
박수칠 때 떠난다
러·中 등 해외시장 개척 온힘…상승궤도 오르자 경영서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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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쇄파업 노조 끌어안은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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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칠 때 떠난다
러·中 등 해외시장 개척 온힘…상승궤도 오르자 경영서 물러나
이유일 쌍용자동차 사장은 지난 1월21일 신차 티볼리 시승회장에서 깜짝 발표를 했다. 오는 24일 열릴 예정인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이었다.
2009년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된 이후 6년간 노조의 옥쇄 파업, 새로운 대주주 영입, 정리해고자의 복직 투쟁과 정치권의 간섭 등 수많은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쌍용차를 본궤도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이 사장이었다. 신차 티볼리를 계기로 앞으로는 치고 올라갈 일만 남은 상황에서 나온 은퇴 선언은 그만큼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사장은 “다음 세대를 위해 물러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며 “이제는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은 인생을 설계할 시간이 된 것 같다”고 은퇴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모든 성과는 쌍용차 임직원과 도와주신 분들 덕분”이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쌍용차 대주주인 인도 마힌드라그룹의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은 이 사장의 은퇴를 끝까지 만류하다 결국 이 사장이 부회장으로서 조언자 역할을 하는 선에서 결론을 냈다.
77일 옥쇄 파업 때는 회사에서 숙식
이 사장은 현대차에서 마케팅과 해외 영업을 담당하며 사장까지 지냈다. 1999년 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는 호텔 아이파크 부회장(2007~2008년)에 오르며 해외 사업을 주로 챙겼다.
2009년 1월, 법원에서 ‘쌍용차 법정관리인을 맡아 달라’는 연락을 받을 때까지 쌍용차와는 인연이 전혀 없었다. 쌍용차 법정관리인에게 책정된 연봉은 당시 현대산업개발 부회장에서 물러나면서 2년간 보장받은 고문 자리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열정을 쏟아보기로 결심했다.
당시 쌍용차는 국제유가 급등으로 주력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판매가 급감하며 최악의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대주주였던 중국 상하이자동차는 경영권을 포기하고 떠났고 이 사장이 법정관리인으로서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법원 승인 아래 2000여명의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노조는 공장 점거 파업으로 맞섰다. 5월22일부터 8월6일까지 77일간 이어진 옥쇄 파업 기간에 이 사장은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숙식을 해결했다. 노조와 승강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날아온 철제 의자에 맞아 한동안 드러눕기도 했다.
결국 노조원 대부분이 회사를 살리자는 데 뜻을 모으고 새 집행부를 구성한 데 힘입어 쌍용차 노사는 무급휴직 450여명, 희망퇴직 1900여명, 정리해고 150여명 등으로 합의에 도달했다. 이 사장은 “당시 대부분 직원들에게서 회사를 살리려는 의지를 본 게 쌍용차에 열정을 바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진정성으로 노조 협조 이끌어내
이 사장은 쌍용차에 온 이후 골프를 끊었다. 술은 1년에 딱 한 번 마신다. 매년 봄 임금·단체협상을 앞두고 하는 노조와의 1박2일 워크숍 때다. 이 사장은 평택공장을 거닐다가 수시로 노조 사무실에 들를 정도로 노조를 챙긴다.
노조의 협조가 있어야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쌍용차는 2013년 2월 무급휴직자 450여명 전원 복직 당시 이들을 포함해 평택공장 3개 라인 근로자 3000여명 전체의 배치를 바꿨고, 지난해 하반기 티볼리 생산에 들어가면서 또 한 번 근로자 4분의 1의 배치를 바꿨지만 잡음이 전혀 없었다. 쌍용차 관계자는 “노조가 배치 변경에 동의해준 게 쌍용차 재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쌍용차 노사는 2009년 합의에 따라 경영 정상화 추이에 맞춰 희망퇴직자와 정리해고자 등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킬 예정이다. 이 사장은 “회사가 수익을 내야 임직원의 고용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출 주도형으로 변화 주도
쌍용차 안팎에서는 이 사장이 6년 재임하는 동안 회사가 수출 주도형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가장 큰 변화로 꼽는다. 쌍용차가 연간 최대인 16만1014대를 판매한 2002년, 내수는 14만8166대, 수출은 1만2315대였다. 이 사장이 부임한 첫해인 2009년에는 내수 2만2189대, 수출 1만2747대를 기록했다.
이 사장은 러시아 등 동유럽과 중국 시장을 적극 공략했다. 연간 기준 2위 기록을 세운 2013년, 전체 14만2710대 가운데 수출이 절반을 넘는 7만8740대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전히 수출(7만847대)이 내수(6만9036대)보다 많았다. 이 사장은 “국내에서는 옥쇄 파업으로 쌍용차 이미지가 나빠져 판매를 늘리기 어려웠다”며 “해외에선 이미지가 나았던 데다 수출을 늘리면 국내 소비자의 인식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 해외시장 개척에 여력을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현대차 해외부문 사장 등을 지내면서 구축한 네트워크를 동원해 러시아 솔라스, 중국 팡다 등 현지 대형 딜러들과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이 사장은 “내가 특별한 일을 한 게 아니라 솔라스와 팡다가 먼저 제안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쌍용차 사람들은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등 새 시장은 과거 친분을 맺은 사람들이 중간에 다리를 놓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이라며 “중국 시장도 이전 대주주인 상하이자동차의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새로 뚫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전했다.
밤 비행기로 떠나 다음날 밤 비행기로 귀국
이 사장이 6년간 쌍용차를 상승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모기업인 마힌드라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몫을 했다. 마힌드라 회장은 이 사장에게 쌍용차 경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맡겼고 2012년에는 비(非)인도인으로는 처음 마힌드라그룹의 이사회 멤버로 임명했다.
농기계·상용차 등에 강점이 있는 마힌드라는 2007년 쌍용차의 대형 SUV 렉스턴을 인도에 반조립 제품(CKD) 형태로 들여오겠다는 제안을 할 정도로 관심을 갖고 있었고, 2009년 매물로 나오자 인수자로 나섰다.
협상을 위해 인도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1시간30분에 걸쳐 깊은 얘기를 나눴다. 마힌드라 회장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자동차 회사를 원한다”고 했고 이 사장은 “내 희망은 오직 쌍용차가 부활하는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후 이 사장은 두세 달에 한 번은 마힌드라 본사가 있는 인도 뭄바이를 오가는 강행군을 펼쳤다. 국내 업무가 몰릴 때는 밤 비행기로 떠나 다음날 밤 비행기로 돌아오고 그 다음 날 정상 출근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이 사장은 “마힌드라 회장이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열심히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경영자가 구성원을 존중하고 믿는 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지 마힌드라 회장에게 새삼 배웠다”고 말했다.
이유일 사장 프로필
△1943년 서울 출생 △1962년 서울고 졸업 △1969년 연세대 법학과 졸업. 현대자동차 입사 △1989~1996년 현대차 캐나다법인·미국법인(HMA) 사장 △1997년 현대차 기획본부장 △1998년 현대차 해외부문 사장 △1999년 현대산업개발 플랜트사업본부 사장 △2001년 현대산업개발 해외담당 사장 △2007~2008년 호텔아이파크 부회장 △2009년 2월 쌍용자동차 법정관리인 △2011년 3월 쌍용차 사장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2009년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된 이후 6년간 노조의 옥쇄 파업, 새로운 대주주 영입, 정리해고자의 복직 투쟁과 정치권의 간섭 등 수많은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쌍용차를 본궤도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이 사장이었다. 신차 티볼리를 계기로 앞으로는 치고 올라갈 일만 남은 상황에서 나온 은퇴 선언은 그만큼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사장은 “다음 세대를 위해 물러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며 “이제는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은 인생을 설계할 시간이 된 것 같다”고 은퇴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모든 성과는 쌍용차 임직원과 도와주신 분들 덕분”이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쌍용차 대주주인 인도 마힌드라그룹의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은 이 사장의 은퇴를 끝까지 만류하다 결국 이 사장이 부회장으로서 조언자 역할을 하는 선에서 결론을 냈다.
77일 옥쇄 파업 때는 회사에서 숙식
이 사장은 현대차에서 마케팅과 해외 영업을 담당하며 사장까지 지냈다. 1999년 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는 호텔 아이파크 부회장(2007~2008년)에 오르며 해외 사업을 주로 챙겼다.
2009년 1월, 법원에서 ‘쌍용차 법정관리인을 맡아 달라’는 연락을 받을 때까지 쌍용차와는 인연이 전혀 없었다. 쌍용차 법정관리인에게 책정된 연봉은 당시 현대산업개발 부회장에서 물러나면서 2년간 보장받은 고문 자리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열정을 쏟아보기로 결심했다.
당시 쌍용차는 국제유가 급등으로 주력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판매가 급감하며 최악의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대주주였던 중국 상하이자동차는 경영권을 포기하고 떠났고 이 사장이 법정관리인으로서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법원 승인 아래 2000여명의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노조는 공장 점거 파업으로 맞섰다. 5월22일부터 8월6일까지 77일간 이어진 옥쇄 파업 기간에 이 사장은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숙식을 해결했다. 노조와 승강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날아온 철제 의자에 맞아 한동안 드러눕기도 했다.
결국 노조원 대부분이 회사를 살리자는 데 뜻을 모으고 새 집행부를 구성한 데 힘입어 쌍용차 노사는 무급휴직 450여명, 희망퇴직 1900여명, 정리해고 150여명 등으로 합의에 도달했다. 이 사장은 “당시 대부분 직원들에게서 회사를 살리려는 의지를 본 게 쌍용차에 열정을 바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진정성으로 노조 협조 이끌어내
이 사장은 쌍용차에 온 이후 골프를 끊었다. 술은 1년에 딱 한 번 마신다. 매년 봄 임금·단체협상을 앞두고 하는 노조와의 1박2일 워크숍 때다. 이 사장은 평택공장을 거닐다가 수시로 노조 사무실에 들를 정도로 노조를 챙긴다.
노조의 협조가 있어야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쌍용차는 2013년 2월 무급휴직자 450여명 전원 복직 당시 이들을 포함해 평택공장 3개 라인 근로자 3000여명 전체의 배치를 바꿨고, 지난해 하반기 티볼리 생산에 들어가면서 또 한 번 근로자 4분의 1의 배치를 바꿨지만 잡음이 전혀 없었다. 쌍용차 관계자는 “노조가 배치 변경에 동의해준 게 쌍용차 재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쌍용차 노사는 2009년 합의에 따라 경영 정상화 추이에 맞춰 희망퇴직자와 정리해고자 등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킬 예정이다. 이 사장은 “회사가 수익을 내야 임직원의 고용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출 주도형으로 변화 주도
쌍용차 안팎에서는 이 사장이 6년 재임하는 동안 회사가 수출 주도형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가장 큰 변화로 꼽는다. 쌍용차가 연간 최대인 16만1014대를 판매한 2002년, 내수는 14만8166대, 수출은 1만2315대였다. 이 사장이 부임한 첫해인 2009년에는 내수 2만2189대, 수출 1만2747대를 기록했다.
이 사장은 러시아 등 동유럽과 중국 시장을 적극 공략했다. 연간 기준 2위 기록을 세운 2013년, 전체 14만2710대 가운데 수출이 절반을 넘는 7만8740대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전히 수출(7만847대)이 내수(6만9036대)보다 많았다. 이 사장은 “국내에서는 옥쇄 파업으로 쌍용차 이미지가 나빠져 판매를 늘리기 어려웠다”며 “해외에선 이미지가 나았던 데다 수출을 늘리면 국내 소비자의 인식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 해외시장 개척에 여력을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현대차 해외부문 사장 등을 지내면서 구축한 네트워크를 동원해 러시아 솔라스, 중국 팡다 등 현지 대형 딜러들과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이 사장은 “내가 특별한 일을 한 게 아니라 솔라스와 팡다가 먼저 제안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쌍용차 사람들은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등 새 시장은 과거 친분을 맺은 사람들이 중간에 다리를 놓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이라며 “중국 시장도 이전 대주주인 상하이자동차의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새로 뚫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전했다.
밤 비행기로 떠나 다음날 밤 비행기로 귀국
이 사장이 6년간 쌍용차를 상승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모기업인 마힌드라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몫을 했다. 마힌드라 회장은 이 사장에게 쌍용차 경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맡겼고 2012년에는 비(非)인도인으로는 처음 마힌드라그룹의 이사회 멤버로 임명했다.
농기계·상용차 등에 강점이 있는 마힌드라는 2007년 쌍용차의 대형 SUV 렉스턴을 인도에 반조립 제품(CKD) 형태로 들여오겠다는 제안을 할 정도로 관심을 갖고 있었고, 2009년 매물로 나오자 인수자로 나섰다.
협상을 위해 인도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1시간30분에 걸쳐 깊은 얘기를 나눴다. 마힌드라 회장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자동차 회사를 원한다”고 했고 이 사장은 “내 희망은 오직 쌍용차가 부활하는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후 이 사장은 두세 달에 한 번은 마힌드라 본사가 있는 인도 뭄바이를 오가는 강행군을 펼쳤다. 국내 업무가 몰릴 때는 밤 비행기로 떠나 다음날 밤 비행기로 돌아오고 그 다음 날 정상 출근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이 사장은 “마힌드라 회장이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열심히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경영자가 구성원을 존중하고 믿는 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지 마힌드라 회장에게 새삼 배웠다”고 말했다.
이유일 사장 프로필
△1943년 서울 출생 △1962년 서울고 졸업 △1969년 연세대 법학과 졸업. 현대자동차 입사 △1989~1996년 현대차 캐나다법인·미국법인(HMA) 사장 △1997년 현대차 기획본부장 △1998년 현대차 해외부문 사장 △1999년 현대산업개발 플랜트사업본부 사장 △2001년 현대산업개발 해외담당 사장 △2007~2008년 호텔아이파크 부회장 △2009년 2월 쌍용자동차 법정관리인 △2011년 3월 쌍용차 사장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