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빈국' 네팔의 첫 억만장자, 라면으로 세계 입맛 사로잡다
해마다 많은 사람이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의 관문인 네팔 수도 카트만두를 찾는다. 해발 8000m가 넘는 고봉이 즐비한 히말라야를 찾는 사람들의 면면은 산을 타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 산악인부터 트레킹을 즐기기 위한 일반인까지 다양하다. 다양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에서 느끼는 대자연의 압도감은 방문객들의 인생에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699달러(세계 168위)에 불과해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네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는 기업가가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와이와이(빨리빨리)’ 라면을 무기삼아 세계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차드하리그룹의 비놋 차드하리 회장이다. 2013년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네팔에서 사상 처음으로 억만장자가 탄생했다”며 “해외 진출에 대한 끊임없는 식탐 덕분에 ‘네팔 라면왕’의 재산은 지난 5년간 두 배로 불어났다”고 평가했다. 올해 발표된 그의 재산은 13억달러(약 1조4600억원)에 달한다.

◆성공의 비법은 현장에 있다

비놋은 1955년 기업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도에서 헌옷을 수집해 생활하던 그의 할아버지는 사업 기회를 찾아 네팔로 이주했고, 차드하리그룹의 모태가 되는 직물상을 카트만두에 차린다. 가업을 이어받아 인도와의 직물 교역업에 뛰어들었던 비놋의 아버지 루카란 차드하리는 1960년대 이후 급격히 늘어나는 해외 관광객들에게 주목한다. 1953년 뉴질랜드 산악가 에드먼드 힐러리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정복에 성공하자 히말라야 등정에 대한 인기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몰려 들었지만, 산업 기반이 없었던 네팔에는 이들에게 필요한 물자가 부족했다. 턱없이 부족한 물자에 대해 관광객들의 불만은 줄을 이었다.

관광객들의 불만은 루카란 차드하리에겐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들렸다. 그는 1968년 네팔 최초의 백화점을 카트만두 도심에 설립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인도에서 수입해 온 물건들은 수입액의 몇 배에 달하는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회사의 매출은 커져만 갔다. 10여명에 불과했던 차드하리그룹의 직원은 400명으로 늘어났다.

1973년 해외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비놋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아버지의 건강상태는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았고, 비놋은 18세의 나이로 차드하리그룹의 회장이 되며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졸업이 나의 최종 학력이지만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며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대학이 아닌 현장에서의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차드하리 회장의 눈은 해외 시장으로 향해 있었다. 인구가 3000만명인 네팔은 내수 시장이 좁고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 규제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1980년대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를 방문했을 때 건설에서 식품까지 모든 영역의 사업을 하며 큰 돈을 버는 대기업에 충격을 받았다”며 “규제가 심한 네팔보다는 싱가포르 인도 등 사업 환경이 좋은 지역이 기업을 키우기에 더 적절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 동남아시아 등 인근 지역에 자회사를 세우며 사업을 확장했다. 사업 분야는 제분업부터 건설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라면으로 쌓아올린 억만장자 성공신화

'최빈국' 네팔의 첫 억만장자, 라면으로 세계 입맛 사로잡다
1980년대 중반 사업차 일본과 홍콩을 오가던 차드하리 회장은 공항에 설치된 거대한 라면 광고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극동아시아에서 방문한 관광객들의 배낭에나 들어있던 라면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거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라면의 간편한 조리법과 미각을 자극하는 맛에 매료된 그는 라면을 생산하기로 한다. 라면 사업은 이미 밀가루 제분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그에게 안성맞춤인 사업이었다.

그가 노린 시장은 인도였다. 세계 2위 인구대국 인도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는다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인들을 위해 닭고기 스프를 기본으로 한 라면 ‘와이와이’가 탄생했다. 한국 중국 등에서 들어온 소고기 스프 라면을 먹지 않았던 인도에서 와이와이 라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인도 등 남아시아에서 많이 쓰이는 향신료 마샬라를 첨가한 현지화 전략이 빛을 봤기 때문이다. 생산 초기 일년에 3만개에 불과하던 와이와이 라면의 출고량은 2013년에는 20억개를 넘어섰다. 인도에선 와이와이 라면 생산을 위한 8개의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차드하리 회장은 “세계 35개국에서 와이와이 라면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며 “세계 라면시장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공략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진출은 계속된다

라면으로 벌어들인 이익은 고스란히 사업 확장으로 재투자됐다. 차드하리그룹은 은행ㆍ금융ㆍ소매ㆍ부동산ㆍ호텔ㆍ에너지 부문 등에서 80개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차드하리 회장이 경영을 시작한 지 40년 만에 그룹의 직원 수는 전 세계 8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네팔의 가장 큰 발전 회사와 은행 역시 차드하리 회장의 소유다.

최근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호텔업이다. 차드하리 회장은 1996년 인도 타타그룹이 운영하는 타지호텔과 함께 럭셔리 호텔체인 ‘알릴라’에 지분을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우간다 르완다 브루나이의 호텔 사업에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그는 기부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차드하리재단을 만들어 교육과 의료, 스포츠, 청소년 역량강화 등 네팔의 사회복지를 위해 공헌하고 있다. 재단을 통해 매년 수백명의 네팔 청소년이 장학금을 받고 있으며, 의료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절대 빈곤에서 네팔 국민을 구하고 싶다”며 “이것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내가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