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계 꾸리려 시작한 포장마차
● 감자 800개씩 깎던 주방보조
● 하루 열두 끼 먹으며 메뉴 개발
조선호텔 등 레스토랑 50곳 주방장
“기본에 충실한 호텔만 살아남는다”
해비치 부임 후 레시피부터 표준화
5성급 뛰어넘는 ‘6성급 호텔’ 만들 것
달걀 부침이 그렇게 어려운 요리인 줄은 몰랐다. 노른자를 깨뜨리지 말아야 합격인데 뒤집다 보면 어김없이 노른자가 터졌다. 달걀 한 판을 다 버리고 나서야 겨우 성공했다. 하지만 해냈다는 희열도 잠시뿐. 조리대 한쪽에 치워 놓은 실패작들을 발견한 교수는 불같이 화를 내며 30개 가까운 달걀을 다 먹으라고 했다.
“안 보이게 숨겨 놓았는데 들켰죠. 그걸 그 자리에서 정말 다 먹었어요. 그러고 나서 몇 달 동안은 달걀만 보면 진저리가 났죠. 프라이팬에 쌀을 한 줌 넣고 한 톨도 안 떨어뜨리고 자연스럽게 뒤집는 연습을 틈만 나면 했습니다.”
30년 전인 1985년 경주관광교육원 조리과 학생이던 이민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대표(53)의 첫 실습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달걀 부침 뒤집는 것도 제대로 못해 머리를 긁적이던 스물세 살 청년은 16년 뒤인 2001년 특급호텔 총주방장이 됐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조리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특급호텔 대표 자리에 올랐다.
포장마차 주인에서 특급호텔 조리사로
처음부터 꿈이 요리사는 아니었다. 공고 졸업 후 방위산업체에서 일했다. 하지만 생계를 꾸려가기엔 월급이 너무 적었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얼마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두 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서울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 포장마차를 차렸다. 한번은 롯데호텔에 다니던 친구가 찾아와 음식 만드는 걸 보고는 “솜씨가 있는 것 같으니 호텔에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웨스틴조선호텔 조리사 시험에 지원했지만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정식으로 요리를 배워보기로 하고 경주관광교육원 조리과에 들어갔다. 1986년 졸업 후 첫 실습을 나간 곳이 웨스틴조선호텔이었고, 이곳이 조리사로서 첫 직장이 됐다. 처음 맡은 직책은 키친 헬퍼(kitchen helper), 주방 보조였다. “식자재 나르고 청소하는 게 일의 전부였고 칼이나 프라이팬은 잡아보지도 못했죠. 20㎏짜리 감자 포대를 6~8개씩 받아와 서너 시간 동안 쭈그리고 앉아서 깎았어요. 하루에 감자를 800개씩 깎은 거예요.”
호텔 주방에 들어왔으니 총주방장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호텔 내 모든 레스토랑을 총괄하는 직책이다. 당시만 해도 특급호텔 총주방장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최초의 한국인 총주방장이 돼보고 싶었다.
입사 초기 베이커리에서 일했지만 총주방장이 되려면 양식당에서 경력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총주방장에게 몇 차례 요청해 이탈리안 레스토랑 예스터데이로 옮겼다. 자존심을 상하게 한 작은 사건도 총주방장이 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베이커리 주방장이 스위스 사람이었는데 저보다 한두 살 어렸어요. 어느날 ‘미스터 OO’라고 하면서 말을 걸었더니 정색하면서 자기를 부를 땐 ‘서(Sir)’라는 말을 붙이라는 거예요. ‘두고 보자, 내가 꼭 너보다 높은 사람이 되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하루 열두 끼 먹으며 요리 아이디어 얻어
요리는 재미있었다. 선배들이 레시피라며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던져주면 밤새 외우면서 머릿속으로 음식을 만들어 봤다. 외국에 갈 기회가 있으면 괜찮아 보이는 식당엔 죄다 들어가 음식을 먹어봤다.
“한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갔는데 아침에 도착해서 밤 12시까지 열두 끼를 먹었어요. 먹고 나와서 한 30분 걸어가다 또 들어가서 먹고…. 일식 가이세키(고급 연회 요리)만 두 번 먹었죠. 그렇게 하고 나면 새로운 메뉴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요.”
2001년 꿈꿨던 총주방장이 됐고 2005년 웨스틴조선호텔 최초의 조리사 출신 임원(조리총괄 상무)으로 승진했다. 웨스틴조선호텔과 신세계백화점에 문을 연 레스토랑 50여곳이 그의 손을 거쳤다. 2009년 전환점이 찾아왔다. 해비치호텔에서 이직 제의가 들어왔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뚝섬에 110층 건물을 지으려고 할 때였죠. 그곳에 최고급 호텔도 지을 것이라며 총주방장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당시 해비치호텔은 개장 3년을 맞은 신생 호텔이었죠. 성장할 여지가 많은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뚝섬 초고층 건물 프로젝트가 무산되자 해비치호텔 레스토랑의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레스토랑 음식의 표준 레시피를 정해 제주 해비치호텔과 화성 롤링힐스, 해비치컨트리클럽 등 전 사업장 내 레스토랑이 같은 수준을 유지하도록 했다. 제주 해비치호텔 레스토랑 하노루는 토속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제주 다이닝’으로 특화했다. 다른 특급호텔 레스토랑들과 협의해 조리사들이 한 달씩 교환 근무를 하도록 했다. 이제 해비치호텔 레스토랑은 웬만한 특급호텔 조리사들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와서 맛을 보고 가는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해비치에 오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아주 중요한 손님들이 왔습니다. 제가 못 미더웠는지 그룹 고위 임원이 주방에 들어와서 보고 있는 거예요. 다행히 손님들이 아주 맛있게 먹었다며 만족했습니다. 그 뒤로는 저에게 모든 걸 맡기더군요.”
“해비치호텔을 6성급으로”
대표가 된 뒤 그가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은 ‘기본’이다. 인사하는 것부터 전화 응대까지 기본에 충실해야 최상의 서비스가 완성된다는 생각에서다.
“호텔업계 사람들끼리는 호텔을 부동산업이라고 합니다. 목이 좋은 곳에 있어야 되고 시설 투자를 계속해야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는 호텔의 본질은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전국 각지에 호텔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결국 서비스가 강한 호텔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호텔 최고경영자로서 목표는 ‘6성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호텔 등급은 별(한국은 무궁화) 다섯 개가 최고지만 일부 고급 호텔은 시설과 서비스가 5성급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6성급 호텔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인수한 서울 삼성동 옛 한국전력 터에 그룹 통합 사옥과 함께 자동차 테마파크, 최고급 호텔 등을 지을 계획이다. 오는 5~6월엔 제주 해비치호텔에 프랑스 요리를 중심으로 한 파인 다이닝(고급 정찬 식당)을 열 계획이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생기는 파인 다이닝이다. “제주산 식재료를 사용해 이전에 없던 요리를 선보일 계획입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는 직원 역량을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둘 생각이에요.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직원들의 경험과 노하우가 쌓이면 호텔 전체 서비스 수준도 높아질 것입니다.”
그는 젊은 요리사들이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등 주목받는 것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요리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간혹 공부하기 싫어서 요리를 배운다는 학생이 있어요. 요리는 무궁무진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재미있지만 그만큼 끝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돼요. 최고가 되겠다는 열정과 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특급호텔 셰프 전성시대
요리가 호텔의 경쟁력…조리사 출신 임원 늘어
셰프들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케이블TV를 중심으로 요리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유명 셰프들은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셰프테이너(셰프+엔터테이너)’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대중적인 인기만 높아진 것은 아니다. 직업인으로서 요리사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최근 국내 호텔업계에서는 조리사 출신 임원이 증가하고 있다.
이민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대표 외에 박효남 세종호텔 전무(총주방장), 후덕죽 신라호텔 중식조리총괄 상무, 이병우 롯데호텔 상무(총주방장), 여경옥 롯데호텔 중식담당 상무 등이 조리사 출신으로 ‘별’을 땄다. 식음 부문이 호텔의 경쟁력을 판가름하는 주요 요소로 떠오르면서 조리사 출신을 우대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특급호텔은 일반적으로 서류 전형-실무자 면접-임원 면접 등을 거쳐 조리사를 채용한다. 실기시험을 치르는 곳도 일부 있다. 대부분 호텔이 결원이 생길 때만 충원하기 때문에 문이 넓지는 않다.
호텔별로 차이는 있지만 보통 6개월 이상의 인턴 과정을 거쳐야 정식 조리사가 될 수 있다. 롯데호텔은 인턴 조리사를 뽑은 뒤 9개월 후 심사를 통과한 사람에게 정규직 전환 자격을 준다. 심사를 통과했다고 바로 정규직이 되는 것은 아니고 1년간의 지원사원 기간을 거쳐야 한다.
특급호텔 조리사들은 대체로 하루 9~10시간 선 채로 음식과 씨름한다. ‘군기’도 센 편이다. 칼과 불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규율이 엄격하다. 특급호텔 조리사의 초봉은 정규직을 기준으로 연 2000만~2500만원이다. 인턴 조리사 월급은 대부분 150만원 이하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