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C의 '고사(枯死)작전'에도…마르지 않는 美 셰일오일
“유가가 배럴당 20달러로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시장 점유율을 석유수출국기구(OPEC) 이외의 국가에 내주지 않겠다.”

OPEC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알리 알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지난해 11월 OPEC 회의에서 한 말이다. 유가 하락을 감수하고서라도 석유 생산량을 유지해 미국의 셰일오일 산업을 고사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FT)는 16일 “미국 셰일오일 산업이 예상보다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며 저유가 상황에서도 살아남고 있다”고 보도했다. 셰일오일 기업이 구조조정과 기술 개발 등을 통해 버티며 생산을 줄이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FT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원하는 셰일오일 산업의 몰락은 오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히려 저유가로 고통받고 있는 OPEC 회원국 간 결속력이 약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수지 악화에도 셰일오일 생산은 늘어

미국 원유값의 지표인 서부텍사스원유(WTI)는 OPEC이 생산량 유지를 발표한 작년 11월 배럴당 70달러대에서 최근 45달러 내외로 떨어졌다. 배럴당 55달러 수준을 회복한 북해산 브렌트유와 중동산 두바이유보다 10달러 정도 낮은 가격이다. 반면 생산비는 미국의 셰일오일이 평균 배럴당 57달러로, 중동산 원유(평균 배럴당 30달러)보다 높다. 더 비싸게 생산한 원유를 더 싸게 팔아야 하는 상황이라 미국 셰일업체들의 수지는 악화됐다. 이 영향으로 미국에서 가동 중인 셰일오일 굴착기 수는 작년 10월 대비 46% 감소했다. 셰일오일 채굴 기업은 자본 투자를 20~70% 줄일 예정이다.

하지만 셰일오일 생산량은 꾸준히 늘고 있다. 미국 내 최대 셰일오일 생산지대인 텍사스주 퍼미언의 하루 석유 생산량은 200만배럴까지 늘었다. 올해 셰일오일업체 마라톤오일의 경우 투자를 40% 줄이기로 했지만 올 들어 생산량은 전년 동기 대비 6% 늘었다. 투자가 14% 감소한 헤스오일도 생산량이 14% 증가했다.

유가 하락이 셰일오일 산업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면서 살아남은 업체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1년간 셰일 유정당 원유 생산량은 24~30% 증가했다. 관련 기자재 수요 감소로 장비 이용료가 20~30% 정도 하락한 것도 셰일오일 업체에 도움이 되고 있다.

◆OPEC에 위기 올 수도

미국 셰일오일 산업이 기대만큼 타격을 입지 않으면서 OPEC 회원국 간 갈등도 커지고 있다. 외환 보유액이 충분치 않은 중남미나 아프리카 회원국은 원유 생산량을 줄여 유가를 끌어올리길 바라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가 국가 파산의 위험을 피하려면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 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추산했다. 나이지리아도 올해 배럴당 78달러를 기준으로 예산안을 수립했다. 하지만 유가가 급락하면서 베네수엘라는 생활필수품 조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고, 나이지리아에선 정부 통제력이 약해지며 보코하람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지난 10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OPEC 회원국 간 갈등 누적으로 원유가격 카르텔이 가까운 시일 안에 붕괴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밀, 설탕부터 주석에 이르기까지 많은 원자재 카르텔이 등장했지만 가격 하락기에 회원국 간 의견 불일치로 사라졌다는 근거에서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