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거식증
1995년 박철수 감독의 영화 ‘301 302’가 개봉됐을 때만 해도 음식 먹기를 거부하는 거식증(拒食症)은 낯설었다. 영화 속 윤희(황신혜 분)는 의붓아버지의 강간과 사고사의 트라우마 탓에 음식과 섹스를 거부하는 여자다. 작가 한강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채식주의자’(2009)에도 아버지의 육식 강요와 가정 내 폭력이 채식 집착, 거식증, 자살기도로 나타난다. 거식증은 심리·정신적 요인이 크다.

거식증의 진단명은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 살을 빼려는 강박적 행동이 체중 집착, 살 찌는 두려움으로 인해 섭식장애로 이어진다. 심하면 적정체중 대비 30% 이상 빠지고 치사율도 10%에 이른다.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폭식증(暴食症)을 동반하기도 한다.

과거 먹을 것이 태부족이던 시절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류 유전자는 스스로 숨을 참아 죽을 수 없듯이 식욕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먹을 게 풍부해진 20세기에 다이어트와 거식증이 등장한 것은 풍요의 역설이다. 밀의 실질가격(물가상승분 제외)은 부셸(27.2㎏)당 5달러로 100년 전 가격의 4분의 1에 불과할 만큼 먹을 게 넘쳐나는 세상이다.

마릴린 먼로 시절만 해도 풍만함이 곧 미(美)였다. 그러나 1959년 바비 인형, 1966년 17살 패션모델 트위기의 등장으로 미의 기준은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인체를 6 대 1로 축소한 바비 인형은 175㎝로 환산하면 체중 50㎏, 36-18-36인치의 비현실적인 몸매가 된다. 트위기는 167㎝, 40㎏였다. 트위기(twiggy) 자체가 ‘잔가지 모양의’란 뜻이다. 다이어트 열풍이 세계를 휩쓴 계기다.

거식증이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것은 1983년 남매 팝그룹 카펜터스의 동생 카렌(당시 32세)이 지나친 다이어트 끝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다. 이렇듯 거식증은 다이어트 강박증이 주된 원인이다. 몸매에 예민한 10~30대 여성, 특히 모델 발레리나에서 주로 나타난다. 여성 연예인의 프로필을 보면 체중은 믿거나 말거나 50㎏ 미만이다. 그러니 남성들은 여성이 50㎏를 넘으면 뚱뚱하다고 오인하고, 여성들은 다이어트에 더 몰두하는 악순환이다.

최근 스페인, 이탈리아에 이어 프랑스도 말라깽이 모델 퇴출 법안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법안이 요구하는 최소 체질량지수는 18이다. 키가 175㎝이면 체중은 55㎏ 이상이어야 한다. 이를 어긴 패션쇼 대표에게는 최고 징역 6개월이나 벌금 9000만원이 부과된다. 과잉규제란 반발도 있지만 오죽하면 이럴까 싶다. 다이어트, 성형을 부추기는 국내 TV들도 깊이 반성할 일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