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법원 구성의 다양화
법원의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직관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그 문맥을 보면 같은 용어로 다른 개념을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법관의 양심은 직업적 양심이며 개인의 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적 소신이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 늘 조심하며 살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 경험이나 지적편력의 편차에서 발생하는 가치관의 미세한 색상 차가 배어 나오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 즉 실험실 수준의 증류된 직업적 양심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기는 어렵다.

이 정도의 차이를 반드시 막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의 교섭을 거쳐 더 나은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고 더 나은 근거를 검증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합의제나 상소제의 미덕이며, 대법원의 심판이 전원합의체를 원칙으로 하는 이유이다.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동조자를 규합하고 자신의 견해를 양보해서라도 주변의 견해와 타협해 연합전선으로 다수를 획득하는 것은 정치에서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결정해야 하는 법원의 판단에서 다수를 향한 이런 방식의 합종연횡은 있을 수 없다. 법관의 방식은 양보와 타협이 아니라 설득과 경청이다. 다수의 견해가 아니라 전원을 설득할 수 있는 하나의 옳은 견해가 더 중요하다. 법원 구성의 다양화에 대한 당위는 여기에 있다.

각 이해집단이 자신들 편을 법관으로 임명시키려는 것을 법원 구성의 다양화라고 할 수는 없다. 처음부터 특정 이해집단의 입장이나 당파적 견해를 관철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의 견해가 직업적 양심일 수는 없다. 법원은 법적 문제에 대해 규범적 성찰을 통해 옳은 결론을 도출하는 곳이지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해 다수자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곳도 아니고 소수자가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곳도 아니다. 다수결에 의한 정치적 승패와 무관한 일관된 법해석이야말로 최종적으로 소수를 보호한다.

법원 구성의 다양화란 개인적 소신을 떠나 직업적 양심에 따라 규범적으로 판단하는 충분한 훈련과 자세를 갖춘 사람 중에서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양화의 미덕은 그들이 서로 설득과 경청을 통해 더 나은 견해로 나아간다는 점에 있다. 다양한 사람을 모아 놓았을 뿐 설득과 경청의 과정 없이 서로 다른 판결을 양산한다면 이로 인한 혼란은 국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칠 것이다.

윤성근 < 서울남부지방법원장 skyline@scourt.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