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적 가치' 놓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논쟁
리 전 총리가 한국을 처음 방문해 1박2일 일정으로 경주에 갔을 때의 일화다. 박 전 대통령은 포스코(당시 포항종합제철)를 보여주고 싶어 일부러 서울에서 포항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뒤 자동차로 제철소를 지나 경주에 가도록 했다. 자존심 강한 리 전 총리는 차창 밖의 제철소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리 전 총리가 한국의 발전을 인정하게 된 것은 경주 관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농촌 풍경을 보면서다. 당시 리 전 총리를 수행했던 김성진 전 문화공보부 장관은 “경부고속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누런 벼 이삭과 빨간 고추 등 가을 들녘의 풍요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리 전 총리의 얼굴이 부러움과 오기가 뒤섞인 표정으로 상기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는 리 전 총리가 박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모델을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민주화를 이끌었던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과는 각을 세웠다. 평소 경제발전을 위해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리 전 총리의 ‘아시아적 가치’ 주장에 1994년 한국의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공개 비판한 사실은 유명하다. 미국 유력 정치평론지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글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의를 존중하는 동양적 가치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다”며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아시아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