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퇴근 후 뭐하세요?
그에게는 딸린 식구가 많다. 돈 나가는 곳도 많다. 아직 딸의 등록금과 아파트 관리비, 세금, 통신요금 청구서도 꼬박꼬박 날아든다. 평생 경찰로 근무한 그가 은퇴자금을 넉넉하게 쌓아 뒀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는 “내 인생에서 지금보다 더 좋은 때가 없었다”고 말한다. 현직 후배들에게도 인기 짱이다. 다른 퇴직 선배들이 죽는 소리만 하는 것과 달리 후배들에게 밥을 사는 선배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저기 와달라는 데가 많은 인기 강사다. 은퇴 설계에 대한 강연과 자문 활동으로 바쁘다. 물론 퇴직 전부터 오래 준비한 결과다. 퇴근 후 남들이 회식이나 단합대회를 하느라 술집을 전전할 때 그는 빵을 배우기 위해 제과제빵학원을 부지런히 다녔고 떡을 배우기 위해 시장판에 쭈그리고 앉아 쌀가루를 버무렸다. 현직 경찰 간부로서 남세스러웠지만 그런 체면은 버렸다.

하루 2시간…10년이면 1만시간

현직보다 더 신나는 제2의 직업을 스스로 개척한 그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년 샐러리맨의 멘토가 돼 중소기업 컨설턴트로 새 출발하도록 도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 퇴근 후 2시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퇴근 후 2시간이 퇴직 후를 위한 골든타임이다.”

그의 말마따나 퇴근 후 2시간과 주말 10시간을 합치면 1년에 1000시간, 10년이면 1만시간이다. 아웃라이어를 쓴 말콤 글래드웰의 ‘1만시간 법칙’도 그렇다. 누구든 1만시간이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

하루 2시간이 버거우면 1시간도 좋다. 단편소설집 나무로 한국에서만 100만부를 넘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매일 저녁 1시간을 할애해 단편을 썼다고 한다. 이야기를 빠르게 지어내는 능력을 유지하고 싶어서였는데, 장편을 쓰는 데서 오는 긴장으로부터 벗어나는 효과까지 얻었다니 일거양득이다.

40~50대를 합친 1, 2차 베이비붐 세대가 1600여만명에 이른다. 3년 후인 2018년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4%를 넘는 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직장인의 평균 퇴직연령을 54세로 보면 약 25년을 일하고 30년 이상을 은퇴자로 보내야 한다. 은퇴 후 삶이 소득형성기간보다 길다. 그런데 베이비붐 세대의 60% 가까이가 노후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

은퇴 후 30년을 평생직업으로

직장인은 일생에 세 번 정년을 맞는다고 한다. 제1 정년은 남이 정하는 고용정년, 제2 정년은 스스로 정하는 일의 정년, 제3 정년은 하늘이 정하는 인생정년이다. 고용정년이나 인생정년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의 정년만큼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게다가 평생직장이 아니라 평생직업의 시대다. 은퇴 후 8만시간이니, 10만시간이니 하는 노후 생활은 현재의 퇴근 후 몇 시간에 좌우된다.

그렇잖아도 숨막히게 살고 있는데 또 무슨 닦달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엔 거꾸로 생각해보자. 하루 1~2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완벽하게 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잘 비워야 잘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늙은 노인(老人)으로 살지, 인생 최고의 시간을 위해 미리 노력하는 노인(努人)이 될지는 순전히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게다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혼자 시작하기 뭐하다면 동료·선후배들에게 연락해서 함께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더 늦기 전에. “퇴근 후 뭐하세요?”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