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노동계 통 큰 양보를 기대한다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노·사·정 논의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통상임금, 근로시간제도 개편,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등 노사현안을 둘러싼 작년부터의 노·사·정 논의과정을 보면 1990년대 중반 노동관계법 개정을 둘러싸고 노·사·정이 벌인 협의를 돌이켜 보게 된다.

민주화 이후 노동관계법이 1988년 한 차례 개정됐으나 활발해진 노동조합 활동을 제도권 내로 녹여내는 데 실패했고, 법적 노조로 인정받지 못한 민주노총이 설립됐다.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함께 본격화된 노동관계법 논의의 핵심 현안은 소위 ‘삼불삼제(三不三制)’로 요약된다. 노조활동과 관련돼 복수노조 금지,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교원·노조전임자에 대한 사용자의 급여 지급 금지의 삼불(三不), 노동시장 유연성과 관련해 정리해고제도, 파견근로제도, 탄력적 근로시간제도의 삼제(三制)를 둘러싼 노사 간 다툼이 치열했다. 2년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노·사·정 합의는 실패했다. 당시 정부 여당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의 공익위원안을 바탕으로 한 정부안을 1996년 12월 한밤중에 소집된 국회에서 기습 통과시켰는데 결국은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 1997년 초에 법을 재개정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리해고제도를 법제화한 것이 대립관계에 있던 양대 노총이 합심해 거리로 나서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그러나 노동계 요구로 2년간 유예된 정리해고제도는 한국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편입되면서 법이 다시 개정돼 1998년부터 시행됐다. 노조전임자에 대한 사용자의 급여지급 금지와 복수노조의 전면 허용은 몇 차례 더 시행이 유보됐다가 2009년 노사관계선진화 입법에 따라 근로시간 면제제도가 도입되면서 법 제정 이후 10년이 지나 시행하게 됐다. 1990년대 중반의 노동관계법 제도의 개혁 논의는 한국이 선진화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국제노동기구(ILO), OECD, IMF 등 국제기구와 국제사회로부터 한국의 노동관계 법제도를 국력에 맞게 개정하라는 압력이 상당했다.

현재의 노동시장 개혁 논의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 변화 및 인구 구조의 변화 등으로 한국 사회에 내재된 여러 모순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7000여건의 노사분규가 있었지만 경제가 고도성장하는 동안에는 노사 간에 나눌 ‘파이’가 컸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일자리 문제는 사회문제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대기업, 금융업 및 공공기관 종사자가 타의에 의해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20년 전에 비해 지금의 노동시장 개혁 논의에서는 노사 간 주고받을 것이 많지 않다. 1990년대 중반에는 노동권 신장과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서로 다른 지향점에서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현재는 임금피크제, 통상임금 등 노동계의 양보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많아 합의가 어려울 수밖에 없으나 국민들은 노동계의 통 큰 양보를 기대하고 있다.

체감 청년실업률이 20%가 넘고, 비정규직 문제는 고착화돼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정년이 연장되는 것은 물론이고 40대도 구조조정되는 노동시장의 구조적 모순 상황을 혁파해 지속적인 성장과 사회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경제가 지속 성장했고, 요구되는 역량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경제발전 단계에서는 연공급 임금제도 및 장시간 근로가 경쟁력을 크게 저해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외환위기 이후 정규직, 대기업 중심으로 노조가 조직화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도 노동계가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박영범 <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한성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