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한·일관계의 불편한 전망
종종 결말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래는 원래 불확실한 것이라고 결정해 놓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거나 할 일을 궁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결말이 예정돼 있는 일들이 많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수정주의는 바뀔 수 있을까. 이변이 없는 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물론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가 있었던 것처럼 후속 정권이 입장을 바꿀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당분간 아니 꽤 오랫동안 그런 변화를 기대하기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과거(역사)를 잊은 민족에는 미래가 없다며 역사적 책임을 강조하고, 독일과 비교하며 양심에 호소해 본들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달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을 돌리고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유감의 뜻을 밝히겠지만 진정한 반성이나 사과보다는 물타기나 꼼수 또는 자기합리화를 시도할 공산이 더 크다.

일본이 나라 규모가 무색하리만큼 대범과는 거리가 먼 협량(狹量)을 드러낸 일은 새삼스럽지 않다. 아베 총리는 지난 27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인신매매의 희생자’로 지칭하며 무라야마 담화와 고이즈미 담화를 계승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반성을 담은 1993년 고노 담화를 재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얼핏 보면 그동안 부정해 왔던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미국 정계와 여론주도층을 향해 본질을 호도하려는 고도의 계산에 따른 립서비스였을 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책임을 민간업자에게 돌리고 심지어 조선인 가담을 주장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 즉 국가의 조직적 개입을 부정해 왔던 것이 아베 정권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이번에도 아베 총리 스스로 강조했듯이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할’ 정치인들이 단정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에 관한 것이므로 일본군 위안부 사건이 일제의 조직적 후원 아래 자행된 ‘성노예’ 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단지 ‘혼네(本音·속마음)’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베 정권이 공식화해 온 입장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베 총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박근혜 정부 임기 동안 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면 국정과제 중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과 ‘한·일 관계 안정화’는 이미 넘을 수 없는 암초를 만난 셈인데, 박근혜 정부의 선택은 무엇일까. 크게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방안과 한·일 관계 복원을 위한 절충주의적 접근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안보환경과 역학구조상, 그리고 동북아 안보에 키를 쥔 미국의 관점에서 한·일 협력이 불가결하다면 현상유지는 어려울 것이다. 반면 역사문제에 관한 한 일본과의 절충이나 타협은 한국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마치 별일 없었다는 듯 정치외교나 군사, 경제 분야에서 협력에 나선다든가, 역사와 정치를 분리한다는 기상천외한 아베식(?) 발상 어느 것도 안보협력의 불가피성 등 그 어떤 상황논리로도 취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의지로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없고 한·일 관계를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둘 수 없다면, 향후 사태 전개에 대비한 더 많은 비책을 마련해 둬야 하지 않을까. 결국 현 단계에서 박근혜 정부의 가능한 선택은 불편하고 속 터지는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협력 공간을 찾아나가는 길뿐이다. 한·일 정상이 제대로 만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협력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아베 정권의 잘못된 역사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 공식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라가 정권보다는 더 오래간다. 아울러 일본의 양심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역사학계와 시민사회, 지식인들 사이의 토론 공간을 넓혀 나가는 노력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장 joonh@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