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노동계, 명분에 집착 말라
노동시장을 시장친화적으로 뜯어고친 독일의 하르츠개혁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파워가 막강한 독일노총(DGB)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밀어붙인 배경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궁금해한다.

하르츠개혁은 한국의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보다 더 강하게 노동시장 유연화에 초점을 맞춰 추진됐다. 그러기에 전문가들은 당연히 독일노총의 반대에 부딪혀 정책추진이 쉽지 않을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독일노총은 예상과 달리 투쟁의 깃발을 올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민주노총이 노동시장 개선의 방향과 관련해 총파업을 예고하는 것과 달리 독일노총은 명분이나 기분에 흔들리지 않고 꼼꼼히 득실을 따지며 냉정하게 대응했다. 비정규직 양산 정책이라는 내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독일노총은 비정규직 증가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던져버리고 기업 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실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2005년 독일노총을 방문했을 때 지도부와 주고받은 얘기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독일노총의 한 간부에게 “왜 하르츠개혁 때 반대투쟁을 하지 않았나” 하고 묻자 “지도부는 격앙됐지만 현장 노조원들의 시큰둥한 반응 때문에 반대성명서도 못 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내놓은 정책에 대해 별다른 이유 없이 반대했을 경우 언론, 정치권, 대학교수 등 여론 지도층으로부터 공격당할 수 있어 투쟁을 접었다”고 덧붙였다. 사회적 압력을 의식했다는 얘기다. 결국 하르츠개혁의 성공은 실용주의 노선과 사회적 압력을 의식한 현실론, 노동계의 주장만을 고집하지 않고 협상파트너인 정부와 재계의 의견을 받아들인 유연한 자세가 어우러져 이뤄진 작품이다. 기득권층인 노동운동가들이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정치적 의로움보다는 좀 더 많은 계층에 일자리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국민친화적이고 보편적인 이로움을 중시한 셈이다. 하르츠개혁의 주요 내용은 해고보호 적용의 완화, 기간제 사용기간 2년에서 4년으로 확대, 파견제 기간제한 폐지, 미니잡·미디잡 등 저임금 일자리 지원 등이다.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대책보다 노동계의 양보를 필요로 하는 핵심이슈가 많았다.

한국 노동계는 어떤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편과 관련해 노동단체들은 ‘비정규직을 양산할 수 있다’며 파업예고 등 구태의연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 논의 중단을 촉구하며 긴급 대응투쟁을 선포한 상태다. 기업의 경쟁력, 일자리 창출이라는 좀 더 생산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투쟁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의 틀 안에 들어와서 논의를 하라”는 국민의 요구에 민주노총은 “안 한다면 어쩔래” 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한국노총 역시 민주적 거버넌스가 확립되지 않아 산하 노조 지도부의 우격다짐에 흔들리는 모양새다. 정책방향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들이 제시한 협상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노동계는 습관적으로 반발한다. 경제주체로서 일정 부분 국가경제를 책임지는 사회적 책무와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염치문화’가 절실하다.

지금 산업현장에는 일자리 전쟁이 한창이다. 고졸, 대졸, 청년층은 물론 경력단절여성, 베이비부머까지 구직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정부는 기술과 능력만 있으면 취업하기 쉬운 능력중심사회로 바꾸기 위해 일학습병행제, 도제식 교육, 현장맞춤형 교육,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제도 도입 등 실용중심 사회로의 대전환을 꾀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도 명분에 집착하기보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실용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기설 < 한국폴리텍대 아산캠퍼스 학장·경제학 upyks@kopo.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