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한국 미래 좀먹는 대리인들
병원 진료를 위해 검사를 받아본 환자라면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과연 지금 하는 검사가 치료에 꼭 필요한 것인지, 병원이 수익을 올리려고 안 해도 될 검사를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다. 이는 전형적인 ‘대리인 문제’ 상황이다. 환자가 병을 치료해 달라고 자신을 맡긴 병원이 과잉진료로 수익을 내려고 한다면 대리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기업 경영에서도 대리인 문제가 불거진다. 주주는 이익추구를 위해 경영진에게 기업을 맡긴 것인데 경영진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딴짓을 한다면 주주로서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주주의 이익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경영진이 이득을 취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미국처럼 분기별로 경영 성과를 평가하는 환경에서는 대리인 문제가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연구개발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성과가 나는 투자 결정을 피하게 되고, 결국 기업은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한국의 공기업이 비난을 받는 것도 대리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일부 공기업은 대규모 적자에도 불구하고 보너스 잔치도 주저하지 않는다. 사기업과 달리 주인이 없어서인지 골치 아픈 구조조정은 늘 뒷전이다. 대리인 문제는 정치 영역에서도 빈발한다. 유권자는 자신을 대리해 국가를 위해 일해 달라고 정치인들에게 표를 준다. 그렇게 국민의 위임을 받은 정치인 중에는 재선에만 관심이 있을 뿐 국가의 미래는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가 4대 구조개혁에 힘을 쏟고 있다. 반발이 심한 분야가 공공 부문과 노동 부문이다. 특히 공무원연금 개혁이 ‘뜨거운 감자’다. 사실 공무원연금 개혁 얘기가 나온 것은 오래전이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추진됐지만 끝내 개혁엔 실패했다. 공무원연금은 지난해 기준 하루에 68억원의 적자가 났다고 한다. 내년이면 하루 100억원을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상황이다. 국민들이 공무원의 노후를 위해 하루 100억원을 지급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바로잡히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이런 것이 바로 대리인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대리인들이 국가를 위한 조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개혁 부문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노동개혁의 주요 과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및 임금피크제 도입 확산이다. 과거에는 중견·중소기업 임금이 대기업 임금의 75% 수준이었는데 현재는 55%밖에 안 된다. 젊은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중소기업에 가라”는 권유라고 한다. 젊은이들은 왜 자신들이 희생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중소기업의 장점을 꼽으며 설득해도 안 된다. 문제는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우수 인력이 중소기업 가기를 꺼리니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은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노동법 제정 당시부터 지적돼 왔지만 고쳐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는 느낌이다. 국익 실현은 뒷전이고 국민에게 당장 욕먹지 않는 일만 하려는 대리인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관계자들이 반대하면 결정을 뒤로 미루고 보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습관처럼 돼 버린 느낌이다. 국민화합과 소통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서 말이다. 실제로는 다음 정권에 그에 따른 부담을 떠넘기고서는 숨어서 미소 짓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리인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다. 개혁 실패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일 수밖에 없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며 느낀 것은 우리 어르신네들이 후손을 위해 희생한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됐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사회엔 주인 의식이 강했다.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다. 개인의 영달보다는 후손과 국가를 먼저 생각했다. 지금은 ‘똑똑한 바보’가 더 많아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미래의 젊은이들에게 ‘국제시장’과 같은 영화를 만들어 보여 줄 수 있을까. 미래를 위한 우리의 결단이 절실한 시기다.

유지수 < 국민대 총장·경영학 jisoo@kookmi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