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우여곡절 많았던 직장생활
삼성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에서
‘능력의 한계’ 절감…영국 유학
삼성 복귀한 뒤 동료들 시샘 받아
이건희 회장 통역 맡은 뒤 ‘반전’

나를 이끈 운명의 힘
금융위원장 후보에서 낙마
KB금융지주 회장 중도하차
“어려워도 자존심·희망 놓지 않아”

11년 만에 돌아온 자본시장
“금융업계 안빈낙도 타성 버려야”


곡절이 많아서였을까.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63·사진)은 3시간여 인터뷰 내내 ‘운명’이란 단어를 많이 썼다. 갑작스러운 영국 유학,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 물거품이 된 ‘민간 출신 금융위원장’ 타이틀, 1년 만에 물러난 KB금융지주 회장 자리…. 그는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어떤 운명의 힘이 나를 끌고 다닌 것 같다”고 말했다.

1989년 외국계 은행을 그만두고 삼성에 복귀했을 때는 오랫동안 ‘왕따’의 서러움을 맛봐야 했다. 금융관료들을 상대로 2009년 시작한 소송은 3년을 넘겨서야 겨우 끝났다. 그러나 원망하기보다는 순응하는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한다. ‘검투사’로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른 역정이었다.

2004년 삼성증권 사장을 끝으로 증권가를 떠난 지 11년 만에 자본시장에 돌아온 황 회장을 서울 신문로 생태탕집 안성또순이에서 만났다. “지난 2월 취임 이후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고(故) 정수창 회장 보며 꿈 키워

“신문로는 서울고등학교 다닐 때의 추억이 많은 곳이죠.” 애주가라는 소문에 걸맞게 앉자마자 소주와 맥주를 섞던 황 회장은 학창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서울로 이사했다. 그때 보살펴준 사람이 황 회장의 외삼촌, 당시 오비맥주 경리부장이던 고(故) 정수창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다. 정 회장은 두산그룹 회장을 두 차례 지낸 국내 최초의 전문경영인이다. “어릴 때부터 외삼촌처럼 잘살아야지, 좋은 회사 다녀야지…늘 그렇게 생각했죠.”

첫 잔을 비우자 새끼손가락 한마디 굵기의 동그랑땡이 나왔다. 잘게 썬 돼지고기 사이의 오징어가 쫄깃하게 씹혔다. 중학교 시절부터 얘기가 풀려나갔다. 점수가 모자라 경기중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황 회장은 운동부로 유명한 경동중에 들어갔다. 새옹지마(塞翁之馬)였다. 특유의 승부근성은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 “운동하면서 자신감을 길렀죠. 탁구를 무척 좋아하다 보니 아버지가 매번 탁구장으로 저를 잡으러 올 정도였어요.”

인생을 바꾼 영어 실력은 서울고 시절 쌓았다. 황 회장은 좋아하던 팝송 200여곡의 가사를 몽땅 외웠다. 동기들은 ‘정통종합영어’를 보며 문법을 익혔지만 그는 팝송을 부르며 공부했다. “팝송을 원곡대로 따라 부르다 보니 발음도 좋아지더군요.”

○사직… 복귀… 삼성과의 질긴 인연

1975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그룹 공채로 합격했지만 ‘무역맨이 되겠다’는 생각에 1·2·3지망 모두 삼성물산을 적어냈다. 거래처에서 ‘배포 있는 신입사원’으로 금세 소문이 났다. “업무 협조가 잘 안 되면 거래처에 가서 ‘앞으로 삼성물산 사장할 사람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으로 옮긴 것은 1978년이다. 2년 전 치른 ‘그룹 영어경시대회’에서 문법과 회화 부문 1등 한 것이 계기였다. 이곳에서 황 회장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판결문보다 긴 영문 계약서와 매일 씨름했다. 해외 투자은행 사람을 접하면서 ‘난 삼성을 대표하고 있는데, 진짜 아는 게 없구나’ 하는 자괴감도 느꼈다. 견문을 넓힌 뒤 삼성으로 돌아오겠다고 결심한 배경이다.

황 회장은 1980년 영국 런던정경대(LSE)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휴직이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고생 끝에 석사학위를 땄지만 해결해야 할 게 많았다. 비싼 학비 때문에 빚이 쌓였던 탓이다. 삼성 복귀를 잠시 미룬 그는 삼성보다 월급이 3배 정도 많은 파리바은행 서울지점에 들어갔다. 그해 뱅커스트러스트은행 도쿄 본사로 스카우트돼 파생상품 아시아마케팅 담당 부사장을 맡았다. 그렇게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삼성은 황 회장을 잊지 않고 있었다. 국내 복귀를 고민하던 1989년, 갑작스럽게 러브콜이 왔다. 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장 자리였다. 입사 동기 중 승진이 가장 빨랐던 최도석 전 삼성카드 부회장과 같은 직급(부장)을 주는 조건이었지만 연봉은 턱없이 적었다.

“삼성에 있던 지인들이 농담으로 ‘먹고살 만 하니까 아예 인연을 끊느냐’고 하더군요. 삼성 연봉이 도쿄에서 근무할 때 낸 소득세보다도 적은 수준이었지만 미련 없이 돌아갔습니다.”

○이건희 회장과의 운명적 만남

[한경과 맛있는 만남]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삼성물산 당찬 신입사원 시절 '난 사장 될 사람' 말하고 다녀"
마침 제육보쌈이 상에 올랐다. 윤기 흐르는 돼지수육을 보쌈 김치로 돌돌 말아 씹어 보니 배추의 수분이 입 안에 퍼졌다. 황 회장은 절반가량 찬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개선장군을 꿈꿨지만 왕따가 됐다. 비서실 사람들은 ‘외국계 회사에서 일한 게 무슨 벼슬이냐’며 수군거렸다. 회식 때도 부르는 일이 없었다. 반전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이건희 회장 통역 일을 하게 된 것. 이 회장 통역 전임자가 계열사 사장으로 옮기자 비서팀장은 영어 잘하기로 소문난 황 회장을 호출했다.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통역해야 했던 당일 오후 6시부터 장장 5시간에 걸쳐 이 회장을 수행했다. 다행히 큰 실수는 없었다. “그날 밤 이 회장 댁 앞에서 ‘가보겠습니다’ 했더니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면서 ‘수고했네’ 하시더군요.”

다음 날부터 비서실 사람들이 황 회장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이 회장의 ‘수고했다’는 표현이 최고의 칭찬이란 사실도 알았다. 정식 통역이 된 그를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1993년 이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하기까지 약 80일간 해외에 머물 때 황 회장이 옆에 있었다. 이후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자존심과 희망, 끝까지 버리지 말라

폭탄주로 목을 축인 황 회장의 이야기는 ‘삼성 이후의 삶’으로 향했다. 2004~2007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임기를 마친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인 2008년 3월 금융위원장 후보로 낙점됐다. 발목을 잡은 것은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촉발된 삼성 특검이다. “삼성 비자금이라고 의심스러운 차명계좌가 공교롭게도 삼성증권과 우리은행에 많았습니다. 제 경력을 놓고 사실이 아닌 말이 떠돌았죠.”

의혹을 씻고 나니 KB금융지주 회장 공고가 떴다. 현직 국민은행장과의 대결이었다. ‘한번 붙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 회장은 이겼다. 그리고 1년, 우리은행장 시절 파생상품 투자 손실에 대한 중징계가 떨어졌다. 조직에 부담을 주기 싫어 회장직을 내려놨다. 그는 ‘일생에서 가장 막막했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그해 12월 황 회장은 긴 싸움을 시작한다. 징계 취소 행정소송이다. 2013년 2월 대법원 승소를 통해 명예를 회복했다.

오후 7시를 가리키던 시곗바늘은 어느덧 9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마침 지름 30㎝ 정도의 냄비에 담겨 나온 생태탕이 끓기 시작했다. 하얀 생태살이 허연 김을 뿜어냈다. 힘든 일을 겪고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법에 대해 물었다. 대답이 생태탕 국물처럼 담백했다. ‘자신에 대한 자존심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부단한 노력.’

젊은 직장인들에게 해줄 말이 궁금했다. 황 회장은 “직장과 가정의 균형은 없다”고 단언했다. 직장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직장에 헌신해야 하고, 개인적인 삶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회사 내의 기대치를 낮추라는 얘기다. 물론 그는 전자를 선택했다. “많은 시간을 가족하고 보낸 적이 없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집안 대소사는 전부 아내가 챙겼어요.”

○“외환위기 때 금융개혁 골든 타임 놓쳤다”

식은 탕을 데우기 위해 버너에 다시 불을 붙이면서 ‘자본시장 발전 방안’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황 회장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은행인 CIMB는 전 세계에 진출했습니다. 대만 유안타그룹만 봐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제조업을 일으켰던 진취적인 기상이 왜 금융업엔 없을까요.”

황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골든 타임’을 놓쳤다며 아쉬워했다. “우리는 외환위기 때 금융이 잘못되면 나라가 거덜난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그런데 ‘고장난 차 수리하는 정도’로 금융개혁을 끝냈죠. 그러고선 관행처럼 과거 패턴으로 돌아갔습니다.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막 협회장을 맡은 만큼 자본시장 발전을 위해 저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황 회장은 밥 한 공기를 시켜 생태탕 국물에 말아 먹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탄주를 10잔 가까이 마신 뒤였다.

■ 검투사 칭호, 어쩌다 얻게 됐나?

황영기 회장은 삼성증권 사장이던 2001년부터 ‘검투사’로 불렸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검투사의 자세로 삼성증권을 바꿔 나가겠다”는 기자간담회 발언이 널리 퍼져서다. 우리은행장 시절 ‘단검 에피소드’는 이런 이미지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2006년 1월 우리은행 영업본부장들에게 지휘봉을 선물했다. 화제를 일으킨 것은 지휘봉 안 단검 때문이다. 그는 “손잡이를 돌리면 단검이 나온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며 웃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삼성물산 당찬 신입사원 시절 '난 사장 될 사람' 말하고 다녀"
■ 황영기 회장의 단골집 안성또순이
자작자작 끓여낸 생태탕…쫄깃한 동그랑땡도 제맛


[한경과 맛있는 만남]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삼성물산 당찬 신입사원 시절 '난 사장 될 사람' 말하고 다녀"
안성또순이는 1979년 문을 연 생태탕 전문점이다. 서울 광화문역 7번 출구로 나와 구세군회관과 서울역사박물관 사잇길로 3분 정도 걸으면 간판이 보인다. 정동에서 종로 피맛골로 옮겼다가 8년 전 지금 위치에 자리 잡았다. 인근 정부서울청사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언론사 기자 등이 즐겨 찾는다. 현오석 전 부총리도 단골이다.

메뉴는 36년 동안 변함이 없다. 생태와 무, 파, 다진 마늘, 고춧가루 등을 세숫대야 같은 둥근 냄비에 듬뿍 넣고 끓인 생태탕, 돼지고기를 갖은 채소와 섞어 잘게 다진 다음 구워낸 동그랑땡, 전라도 시골집에서 공수해온 묵은지로 맛을 더한 삼합, 알이 꽉 찬 암게만 엄선해 만든 간장게장 등이 인기 메뉴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업한다. 명절에만 쉰다. (02)733-5830

■ 황영기 회장

△1952년 경북 영덕 출생 △1971년 서울고 졸업 △1975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75년 삼성물산 입사 △1982년 뱅커스트러스트 아시아마케팅담당 부사장 △1989년 삼성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장 △1999년 삼성투신운용 대표 △2001년 삼성증권 대표 △2004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2008년 KB금융지주 회장 △2010년 차병원 총괄부회장 △2012년 법무법인 세종 고문 △2015년 2월 금융투자협회장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