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에만 머무르지 않고 기획, 제작 등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다양한 분야로 진출해 ‘리틀 SM(이수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EXID는 그가 직접 세운 AB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선보인 걸그룹이다. 지난 2일 서울 청담동 AB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찾았을 때 그는 빨간 후드티와 야구모자를 쓴 채 작곡 프로그램 ‘큐베이스’ 창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작곡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늘 작곡을 중심에 놓고 기획 회의, 업무 미팅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며 “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지만 하고 싶은 것이 아직 너무 많다”고 말했다.
끼 많았던 ‘착한 문제아’
이 대표는 전남 광양에서 자랐다. 경기 수원에서 살다가 어릴 때 아버지가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근무하면서 온 가족이 내려갔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아버지는 사내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꼭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가 다닌 포스코교육재단 산하의 광양제철 초·중·고교는 학내 음악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다. 악기 하나에 열중하지는 않았지만 한 해는 바이올린을 배우고, 다음 해는 트럼펫을 배우는 식으로 자연스레 음악을 접했다. 드럼 잘 친다는 형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음악보다 더 관심이 있던 것은 춤이었다. 수련회 장기자랑이 있으면 꼭 나설 정도로 좋아하고, 잘 췄다.
“춤을 추다 보면 춤에 맞게 곡을 편집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어요. 직접 편곡한 곡으로 추기 위해 작곡을 시작했죠. 그때 배운 작곡이 나중에 ‘밥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담배도, 술도 일찍 배우고 각종 ‘사고’를 치는 이른바 문제아였지만 부모님과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두 살 위 누나가 종종 교무실에 불려가 동생 단속 좀 하라고 야단을 맞기도 했지만 선생님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당시 은사들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해맑은 문제아’여서인지 고교 1학년 때 갑작스레 상경을 선언했을 때 부모님은 선뜻 허락했다. 아이돌 가수가 되는 게 목표였다. “아이돌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기보다, 나도 춤을 추고 노래를 할 수 있으니 도전해볼 만하다고 느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어렸을 때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가 지낸 경험이 있으셨더라고요. 경험이 재산이 된다는 걸 아셨던 거죠.”
아르바이트 전전하며 작곡 시작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SM, JYP, YG 등 주요 기획사 오디션에 줄줄이 떨어진 뒤 고교 2학년 때부터 소규모 기획사에 들어가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약간의 용돈을 보내줬지만 비싼 서울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지하 방에서 살며 중국집 배달, 행사 진행, 가수 매니저, 음식점 주방일 등 손에 잡히는 아르바이트는 모두 해봤다.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일한 적도 있다. 그는 “찜닭집 주방장 형이 나갔는데 레시피를 알고 있어서 직접 요리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우울한 기분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본래 긍정적인 성격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다 ‘배움’이라 생각했다. 그는 “현실이 막막하고 짜증 나는 이유는 한 번에 점프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시기마다 배울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걸 뛰어넘고 한 번에 스타가 되려 하니까 박봉이 억울하고, 빨리 뜨지 않는다고 조바심이 나는 겁니다. 갓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때 각종 고지서가 날아와도 힘겹고 지치는 기분은 안 들었어요. 내가 쓴 것에 대해 사용료를 내는 거라고 생각했죠. 고지서를 보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고 싶다고 느낀다면 책임감이 모자란 거죠.”
편곡 관련 아르바이트도 들어왔다. 행사 음악부터 트로트까지 다양한 음악을 편곡했다. 미디 음악 태동기인 1990년대 말부터 아날로그 악기와 케이크워크, 소나 등 다양한 초창기 소프트웨어를 독학으로 익힌 게 큰 도움이 됐다. 정식으로 ‘신사동 호랭이’라는 예명을 짓고 작·편곡에 나섰다. 이 이름으로 2005년 자두의 ‘남과 여’를 시작으로 350여곡을 작곡하거나 편곡했다.
2008년 발매한 쥬얼리 5집의 ‘원모어타임’ 편곡이 ‘전환점’이었다. 일이 몰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곡을 히트시켰다. 이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트러블 메이커’.
“현아·현승이라는 톱가수를 엮어 더 큰 시너지를 내야 하는 것이 큰 도전이었어요. 당시 빠른 템포의 곡이 유행했는데 상대적으로 느린 트러블 메이커가 히트하면서 이후 느린 템포의 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트렌드를 선도했다는 자부심도 있어요.”
프리랜서여서 늘어질까봐 술 한 모금도 입 대지 않아
그는 “프리랜서여서 많이 벌 때도 있지만 수입이 한 푼도 없을 수 있다”며 “하는 만큼 나오는 게 이 직업의 매력이자 맹점”이라고 강조했다. 생활이 늘어지는 걸 막기 위해 아무리 늦게 잠들어도 오전 7시30분께 일어나고, 술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자신만의 철칙이다.
히트곡 제조 비결은 뭘까. 그는 ‘색깔’과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걸그룹의 색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이미지가 녹아든 곡을 주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 등장한 걸그룹도 S.E.S나 핑클처럼 과거에 제가 좋아했던 걸그룹과 유사한 이미지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당시 느꼈던 설렘, 풍경, 공기 냄새 등을 회상하며 곡을 써요. 요즘은 EXID와 수시로 대화하며 색깔에 맞는 곡을 만드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죠.”
팝음악은 고등학생이 된 뒤 접했다. “늘 가요만 들었고, 제가 도전한 시장이 국내 시장이니 가요 감성이 있는 게 제겐 큰 재산인 거죠.”
서울 보성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그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학벌로 차별을 겪지는 않았을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이 분야는 실력이 바탕이 되는 바닥입니다. 서울대 출신도 능력 없으면 전혀 빛을 볼 수 없어요. 물론 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줄을 잡는 것조차 넓은 의미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죠.”
인터뷰 내내 그는 ‘책임감’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정의했다.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초’현실주의자라고 했다. 무슨 의미일까. 그는 “목표와 꿈을 높이 가지는 것은 좋지만 현재 자신의 위치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냉철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누나가 졸업한 뒤 대기업 입사 시험에 낙방했을 때도 신랄하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했다. “당시 누나가 눈을 흘기긴 했죠. 하지만 자신의 현재 능력을 파악해야 꿈에 다가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겁니다. 그걸 하나하나 쌓아 나가면 열등감이나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연한 ‘리셋 증후군’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마음가짐이다. 이 대표는 ‘다 때려치우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 ‘없었던 일이면 좋겠다’ 같은 말을 들을 때 가장 화가 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가지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질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인터뷰 내내 그의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이호양 대표의 제안
“한 가수나 그룹이 여러 소속사서 활동하면 K-POP 진화할 것”
이호양 대표는 한국 가요 생태계가 선진화하기 위해서는 한 가수가 다수의 소속사에서 활동하는 시스템이 정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외국에선 소속사마다 매니지먼트, 마케팅 등 업무별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며 “케이티 페리 등 해외 톱가수도 소속사가 여러 곳인 사례가 많다”고 했다. 가수와 팀이 세분화된 전문 소속사들의 지원을 받으면 팀과 곡의 완성도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색깔도 효율적으로 살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대표는 “가수에게도 좋을뿐더러 각 소속사 관계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시스템”이라며 “한 번에 SM JYP 같은 거대 소속사를 만들려는 꿈을 꾸는 대신 전문 소속사에서 착실히 전문성을 쌓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 자신도 AB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맡아 EXID를 기획했고, 현 EXID 소속사인 예당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일하는 등 네 개의 회사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종사하다 보면 기획자, 마케터 등 한 사람이 다양한 일을 할 기회가 많아 여러 업무를 익히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의 장기 목표는 중국 등 해외에 진출해 작곡가와 기획자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해외에서 인정받는 음악 제작자, 기획자로 활동하고 싶다”며 “노력은 결국 길을 열어준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