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많은 사람이 카를 마르크스의 인식에 따라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고 불평등을 야기한다고 믿기 때문에 노동이 의지할 곳은 노동조합과 정부관료뿐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다. 노동소득보다 자본소득에 대한 증세를 지지하거나, 노동을 보호하고 자본은 규제하는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다. 자본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이 최근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해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다. 그는 자본은 불평등의 요인이기 때문에 고율의 누진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맨손으로 고기 잡다 그물 쓰면 생산성 '쑥'…'자본투자'가 노동소득 높이는 번영의 열쇠
유효수요를 늘려 침체된 경제를 살린다며 임금 인상을 촉구하고, 통화·재정지출을 확대하는 최경환 부총리의 정책도 자본을 홀대하는 오랜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전통은 자본의 원천인 저축이 국민 경제를 불황으로 이끈다는 ‘저축의 모순’을 들어 소비를 중시한 케인스의 유산이다.

그러나 자본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틀렸다. 흥미롭게도 노동의 적(敵)은 자본이 아니라 정부관료와 노동조합이다. 자본이야말로 노동의 유일한 친구요 보편적 번영의 열쇠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서 자본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대신 그물, 카누 같은 자본재를 이용하는 사례에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자본재 생산을 위한 투자재원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소비를 억제한 저축이다. 자본 투자를 통해서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고 임금도 인상된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진원지가 자본 구조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유일한 길은 생산성 향상이요, 이는 자본 투자를 통한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미국 노동자의 임금이 인도보다 높은 이유는 미국의 1인당 자본 투자가 높기 때문이다. 높은 임금으로 유럽 노동자의 삶을 개선해준 것도 인구 증가보다 훨씬 높은 자본 축적 덕분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산업혁명의 예를 들어 자본의 노동 착취를 설명한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그건 사실무근이다. 빈곤자에게 고용기회를 줘 노동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게 만든 게 자본이다. 지난 60여년간 한국 경제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노동자 임금이 수십 수백배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폭발적인 자본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은 임금 인상만이 아니다. 생산성 향상으로 가격이 하락하면 실질임금이 상승한다. 이런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역사요 발전원리다. 물가 하락으로 노동자의 삶이 향상된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19세기 산업혁명 당시 임금은 연평균 1.6%로 느리게 상승했지만 구매력은 60~90%로 증가했다. 생산 증가로 야기된 물가 하락 덕분이다. 그런 물가 하락을 목격하고 자본주의는 빈곤의 장본인이라고 인식하는 사회주의이론은 틀렸으니 수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게 오스트리아의 유명 사회주의자 에드워드 베른슈타인이다.

노동자의 삶과 경제가 지속적으로 번영하려면 자본재의 생산구조가 상황에 맞춰 역동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런 변화는 기업가적 창조와 발견의 산물이다. 성장의 진원지는 노동 생활수준 향상의 진원지와 똑같이 자본이다. 자본은 번영의 열쇠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자본재의 생산조건은 자본 투자를 위한 저축이다. 미래를 중시해 소비가 줄어들고 저축이 늘수록 생산구조가 복잡해지고 심화돼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 역동적이게 된다. 그 결과는 번영이다. 기존의 건물을 유지하거나 감가상각 정도의 저축을 넘어서는 순저축이 없는 사회는 기존의 자본재까지도 갉아먹는다. 그 결과는 빈곤의 악순환이다.

맨손으로 고기 잡다 그물 쓰면 생산성 '쑥'…'자본투자'가 노동소득 높이는 번영의 열쇠
소비가 경제의 추진력이고 저축 증가로 인한 소비 지출의 부족이 경기침체의 원인이라고 보는 케인스주의의 시각은 틀렸다. 소비는 경제적 번영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사고파는 상품들은 196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통화나 정부지출을 늘려서도 아니요 소비가 늘어나서도 아니다. 오로지 저축 증가에서 나온 생산의 결과다.

경제를 살리고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건 소비가 아니라 자본 투자다. 투자가 많아야 경제가 살아나고 일자리도 늘어난다. 유감스럽게도 투자를 현재 소비의 직접적인 함수라고 믿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재정지출이나 심지어 임금을 인상해서까지 소비 수요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기적 투자로는 일자리 창출도, 생산성 향상도 기대할 수 없다.

진정한 번영은 먼 장래를 위한 자본 투자에서 나온다. 이런 투자는 소비재 생산단계와 멀리 있는 자본재 생산단계를 위한 투자다. 따라서 투자 증대를 위해 소비 수요를 촉진하는 정책은 지속적 번영에 치명적이다. 자원이 미래 소비를 위한 투자 대신 현재의 소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자본구조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케인스의 유효수요 정책은 먼 장래에 혜택을 주는 자본구조의 파괴를 초래하고 노동자의 삶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지 못한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소비재와 자본재 생산을 가능케 하고 노동계층은 물론 모든 계층에 전대미문의 경제적 번영을 안겨준 것은 현재 소비의 지출이 아니라 미래 소비를 위한 투자 때문이다.

모든 사회체제가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윤 추구와 기업가 정신을 허용하는 자유시장에서만이 생산적인 자본 축적이 가능하다. 오늘날 수십억명의 인구 증가를 불러와 먹여 살리는 것은 시장경제다. 자본구조의 심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자유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부지출, 조세부담을 줄여야 하며 노동을 보호한다고 자본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없애야 한다.

그런 정부의 간섭과 규제는 저성장과 실업을 야기하며 그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부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대판 마르크스’ 피케티는 틀렸다

“자본이 불평등 주범 아니다”…뵘바베르크가 이미 100년前에 증명

뵘바베르크
뵘바베르크
오늘날 ‘자본(資本)’을 말하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를 떠올릴 만큼 피케티는 저서 21세기 자본으로 일약 스타 경제학자가 됐다. 피케티는 자본은 불평등의 필연적인 주범이요, 노동의 적이기 때문에 사악한 자본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고율의 자본세라고 피케티는 목소리를 높인다. ‘현대판 마르크스’라도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피케티의 주장의 치명적인 결함은 자본은 인간 행동 없이도 스스로 유지되고 증식된다는 신비로운 전제다. 그러나 이미 100년 전에 그런 자본관은 틀렸다고 목소리를 높인 인물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1851~1914)다. 뵘바베르크는 자본수익은 생산적으로 이용하려는 기업가적 착상, 능력, 노력 등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피케티
피케티
뵘바베르크는 자본은 노동 착취와 불평등의 화신이란 사회주의 논리가 횡행하던 20세기 초, 자본이야말로 노동의 친구요 번영의 열쇠라는 주장으로 맞섰다. 독일어권에서는 기업들이 자본을 노동의 적으로 여기는 마르크스 추종자 채용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이것도 뵘바베르크가 마르크스 사상의 치명적 오류를 낱낱이 밝혀냈기 때문이다.

시간 선호를 반영하는 이자와 저축을 통해 자본이 형성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뵘바베르크는 자본재 지출을 늘리는 과정에서 복잡한 자본구조가 형성되고, 이 구조가 생산성 향상, 고용 등을 통해 노동의 삶을 개선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은 노동의 친구라고 하는 뵘바베르크의 인식이 옳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으로도 입증된다. 1975년 40.5%였던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은 현재 60%로 높아졌는데 이는 자본축적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전통적으로 자본이득세가 소득세율보다 낮은 것도 그렇다. 자본소득세율이 높으면 자본은 노동소득과는 달리 재빨리 해외로 사라진다. 이것은 국내 노동자의 일자리와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불평등을 막기 위해 고율의 누진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틀렸다. 노동의 적은 자본이 아니라 자본세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