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재판의 사회적 가치
사회가 있는 곳에 분쟁이 있다. 처음에는 상대를 힘으로 제압해 분쟁을 해결했고 힘이 없는 사람은 억울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재판제도가 도입되면서 평화적 분쟁 해결이 가능해졌다.

재판은 사실인정과 법 적용의 단계로 나뉜다. 사실인정이란 과거의 사실을 증거를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빌려준 돈을 갚으라는 소송이라면 돈을 빌려준 사실이 먼저 확정돼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은 불완전해서 직접 경험해도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기억도 여러 이유로 왜곡된다. 문자와 음성에 사용되는 언어 역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인정에 작용하는 경험이나 논리법칙은 인간의 지식이다.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지식은 거의 없다.

이렇듯 재판의 대전제가 되는 사실인정에는 잘못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최선을 다해 심리했지만 확정할 수 없는 사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결론을 선언해야만 한다.

재판제도의 사회적 가치 핵심은 절대적 진실 발견이 아니라 분쟁의 종국적 해결이다. 그 성공의 열쇠는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승복이다. 확정된 재판에 승복하는 것은 인정된 사실이 절대로 옳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인정에 관해서는 아무리 재판을 거듭해도 완벽한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왜곡되고 증거는 사라진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사실인정을 위한 재판은 한 번만 하며 법률문제에 관한 상소만 허용한다.

미국은 본래 1심법원과 대법원으로만 구성된 2심제였다. 사실인정 권한을 가진 1심 재판에 대한 법률문제의 상소를 대법원에서 판단했다. 그러다가 연방대법원의 업무량 폭주로 연방항소법원이 신설됐다. 이곳에서 1심 재판에 대한 상소를 처리하지만, 여전히 사실문제가 아닌 법률문제만 다룬다.

한국에선 1심 재판에 대해 상소한 후 사실관계에 대해 1심과 다른 주장을 하고 새로 증거를 내는 것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다. 즉 항소심 재판도 사실심이다. 현재의 재판구조하에서 항소심을 법률심으로 바꾸지 못하는 이상 사실심 재판에 대해 법률문제에 관한 한 번의 상소는 허용됨이 마땅하다. 그 결과가 대법원의 사건 폭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 폭주로 연방항소법원이 신설되던 상황과 비슷하다. 사실심 재판의 법률문제에 관한 상소를 허용하되 대법원의 기능을 정상화하는 최선의 선택이 상고법원이다.

윤성근 < 서울남부지방법원장 skyline@scourt.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