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들림 없이 부정부패 수사를” > 김진태 검찰총장이 1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 “흔들림 없이 부정부패 수사를” > 김진태 검찰총장이 1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이 자원외교 비리 의혹으로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정치권에 금품을 전달한 정황을 적은 메모를 확보했다. 이 메모에는 검찰이 확인한 김기춘·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외에 이병기 현 비서실장, 이완구 국무총리 등 현 정부 핵심 인사들의 이름이 적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성 전 회장이 목숨을 끊기 전 이 메모와 관련 있는 내용을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육성파일도 공개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임관혁)는 “지난 9일 저녁 삼성서울병원에서 성 전 회장의 시신을 검시하는 과정에서 8명의 이름과 금액이 적힌 쪽지가 발견됐다”고 10일 밝혔다.

메모지는 성 전 회장의 윗옷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이 중 6명은 금액이 기재됐고 1명은 날짜까지 표기돼 있다. 김·허 전 비서실장 등에게 돈을 건넸다는 내용의 성 전 회장 육성이 담긴 3분51초 분량의 녹취파일도 공개됐다. 녹취파일에서 성 전 회장은 옛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전후한 시점인 2006년 9월 김 전 실장에게 10만달러(약 1억원)를, 2007년 허 전 실장에게 7억원을 줬다는 취지로 말했다.

메모에는 ‘홍준표 1억, 부산시장 2억, 홍문종 2억, 유정복 3억, 허태열 7억, 김기춘 10만달러, 이병기, 이완구’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 단서로 검토해 볼 수 있다”며 “다만 핵심 관련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현실적·법리적인 장애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메모에 적힌 전체 글자 수는 55자”라며 “필적감정을 의뢰해 메모가 성 전 회장의 것이 맞는지를 먼저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성 전 회장의 장례절차가 끝나는 대로 유족과 경남기업 측에 메모와 관련된 자료를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성완종 메모' 일파만파] 정권 핵심 8명 거론…김진태 "메모 작성 경위 조사하라"
검찰이 수사에 착수할지를 결정하는 변수는 △메모와 육성파일이 증거 능력이 있는지 △성 전 회장의 유족과 경남기업 측이 관련 자료를 보유했는지와 제출 의향이 있는지 △메모 내용으로 혐의를 구성한다면 공소시효가 남아있는지 등이다.

성 전 회장의 법정진술이 없지만 남긴 메모나 육성 인터뷰는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여지(증거능력)가 있다. 하지만 메모 관련자들이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어 추가 증거가 확보되지 못하면 성 회장의 일방적 주장에 그칠 수도 있다.

성 전 회장이 사망 당시까지 갖고 있던 휴대폰 두 대에도 이목이 쏠린다. 성 전 회장이 자살 직전까지 다수의 정치권 핵심인사와 접촉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의 통화내역과 문자메시지 등이 공개되면 경우에 따라 메모와 녹취에 이은 또 하나의 ‘판도라의 상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공소시효와 관련해 성 전 회장이 김 전 실장 등에게 건넨 돈의 성격을 뇌물로 볼 것인지 정치자금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검찰은 다른 판단을 내리게 된다. 대선 경선을 전후한 시점에 건네진 금품인 만큼 이를 불법정치자금으로 본다면 공소시효가 이미 지나 기소가 불가능하다. 정치자금법은 공소시효가 7년이어서 2006~2007년에 이뤄진 일이면 시효가 지났다. 뇌물죄를 적용하면 공소시효는 7년이지만 수뢰액이 3000만원 이상이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이 적용돼 공소시효가 10년으로 늘어난다.

한편 김진태 검찰총장은 이날 오후 검찰 간부진을 불러 “메모지 작성경위 등을 확인하고 관련 법리도 철저히 검토해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진행 중인 부정부패 수사를 흔들림 없이 계속하라”고 주문했다.

배석준 기자 eul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