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년…슬픔만 남고 '국가 개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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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작가·사회평론가 특별기고
(1) 도덕적 사회, 우리가 이뤄야 할 시대적 과제
참사 1년, 근본대책 마련 못하고 '주장'에 휘둘려
슬픔의 강력한 에너지 승화시킬 기회도 잃어
대담한 상상력 발휘, 무기력 벗어날 지도력 절실
(1) 도덕적 사회, 우리가 이뤄야 할 시대적 과제
참사 1년, 근본대책 마련 못하고 '주장'에 휘둘려
슬픔의 강력한 에너지 승화시킬 기회도 잃어
대담한 상상력 발휘, 무기력 벗어날 지도력 절실
“정부는 단 한 번도 주도적으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서 합리적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긁어 부스럼’을 피하자는 태도만 보였다. 그런 태도가 안은 치명적 위험은 목청이 큰 사람들의 주장에 휘둘려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다.”
서울 둘레길을 따라 진달래가 다시 피었다. 잎새가 나오기 전에 먼저 피는 분홍 꽃은 애잔해서 헤어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월의 시에서도, 이흥렬의 노래에서도 진달래는 헤어짐을 상징한다. 그 꽃잎들에 앳된 얼굴들이 겹친다. 이어 물음이 나온다. “한 해 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나?”
한 해 전 우리는 다짐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하고 맑은 사회로 만들자고. 온 나라가 슬퍼하는 비극은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어떤 감정보다 깨끗해서 상처를 씻어 아물게 하고 재앙을 극복하는 심적 자산이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심적 자산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흩어지도록 했다. 갖가지 안전사고가 일깨워주는 것처럼 그때보다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진 것도 아니고, 잇달아 나오는 추문이 가리키는 것처럼 더 맑아진 것도 아니다.
실은 문득 진 꽃들을 절제된 태도로 애도하는 지혜도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유족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일마다 의견을 달리했다. 끝내는 유족 대표들이 가난한 대리운전사를 폭행해서 기소되고 위세를 부린 야당 국회의원은 공범으로 수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다 우리는 이런 상황으로 몰렸는가.
지난해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의 침몰은 여러 요인이 겹쳐서 일어났다. 그 요인들은 본질적으로 도덕심의 부족에서 나왔다. 낡은 배를 사서 취미를 즐기려고 회삿돈으로 한 층을 더 쌓아서 배를 위태롭게 만든 해운회사의 사주, 무리한 개축을 ‘적재 화물을 크게 줄인다’는 조건으로 허가해서 자신들의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한 선박 전문가들, 과다 적재를 강요한 해운회사 실무자들, 안전 점검을 아예 하지 않고 서류만 꾸민 여러 감독기관 요원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도덕심이 부족한 선장과 선원들…. 이들 가운데 최소한의 도덕심을 지닌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 배는 많은 승객과 함께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정부는 사고를 수습하는 절차를 밟으면서 우리 사회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드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세월호 사고가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낮은 도덕적 수준에서 나오는 갖가지 사건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사회를 보다 안전하고 맑게 만든다는 목표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법과 조직을 바꾸는 일에 매달렸다. 느닷없이 해양경찰청을 없애고 국민안전처를 새로 만들었다. 늘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며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을 목숨을 걸고 막아내는 해양경찰 조직을 단 한 번 미흡했던 책임을 물어 없앤 것은 정의롭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국민안전처를 새로 만들면 정부가 커져서 세금은 분명히 더 들지만 시민들이 더 안전해질지는 확실치 않다.
진단이 그르면 옳은 처방도 좋은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해양경찰청을 해산할 만큼 정부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면 궁극적 책임은 당연히 대통령이 져야 한다. 여러 요인들이 겹쳐서 일어난 교통 사고가 제대로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정부와 대통령의 책임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 뒤로 세월호 사고에 관련된 일들에서 정부와 대통령은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정부의 조직 변경으로 대책이 마련됐다는 논리가 서자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인다는 근본적 대책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 시민들의 마음에서 일었던 슬픔의 깨끗한 에너지는 좋은 목적에 쓰이지 못한 채 그냥 흩어졌다. 한국이라는 배가 힘차게 항해에 오르도록 터빈을 돌릴 수 있었던 뜨거운 증기가 헛된 김으로 새어 나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는 목적항도 잊고 항로도 모르고 추진력도 잃은 채 표류하는 배처럼 됐다. 모든 행사들이 취소되고 모든 사람들이 고개 숙이고 몸을 낮추었다. 자연히 경제는 침체했고 정국은 ‘유족의 뜻’을 내세운 세력이 주도했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면 세월호를 인양하겠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얘기에서 이런 사정이 괴롭게 드러난다. 전문가 얘기를 들을 것도 없이 세월호 인양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비록 선체가 크고 물살 거센 해역의 뻘에 묻혔지만 얕은 바다에 침몰한 배를 건져 올리는 일은 기술적으로 간단하다. 진정한 논점은 ‘과연 그 배를 지금 건져 올리는 것이 타당한가’다. 기술적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문제다. 건져 올리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고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데 혜택은 분명치 않으니, 생각 깊은 사람들이 망설이는 것이다.
만일 야당 지도자들이 늘 강조해온 것처럼 ‘유족의 뜻’이 세월호와 관련된 모든 일들에서 최고의 지혜고 가치라면 박 대통령은 명확히 말했어야 했다. “무슨 비용이 들고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도 세월호를 인양하겠다”라고. 그렇지 않고 합리적으로 비용과 혜택을 계산해야 한다고 여겼다면 그 계산의 결과를 내놓고 시민들의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자신에 관한 추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느라 적극적으로 사회적 논의를 주도하지 못했다. 그동안 세월호 인양에 관한 논의들이 자주 나왔지만, 정부는 단 한 번도 주도적으로 전문가들 의견을 모아서 합리적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긁어 부스럼’을 피하자는 태도만 보였다. 그런 태도가 안은 치명적 위험은 목청이 큰 사람들의 주장에 휘둘려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다.
비용-편익 분석을 하지 못한 채 인양하기로 결정이 나는 바람에 ‘인양한 뒤엔 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는 정작 논의도 안 됐다. 비용-편익 분석의 편익에서 가장 큰 부분이 바로 건진 배의 활용이다. 그런 분석이 없었으니 활용에 대한 논의도 나올 수 없었다. 원래 낡았던 데다 바닷속에 두 해 동안 잠겼을 터이니 막상 건져 올린 뒤의 배는 보존도 활용도 어렵다. 그렇다고 버리기도 쉽지 않다. 다 삭은 선체를 어떻게 하자는 얘기인가? 세월호 인양은 천안함 인양과는 성격과 목적이 전혀 다르다.
이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박 대통령은 무기력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관료주의적 처신에서 훌쩍 벗어나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어느 회의에서나 박 대통령은 적어온 것을 낭독하고 당부하는 것으로 시종한다. 토론도 질문도 없다. 장관들도 비서관들도 관객에 지나지 않는다. 혼자만의 무대는 화려한 것이 아니라 적막한 것이다.
시민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사회적 과업에 시민들이 참여할 자리를 마련한 적이 없다. 세월호 사고 수습 과정에서도 시민들은 관객에 지나지 않았다. 관객이 된 시민들이 뜨겁게 반응할 리 없다. 시민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할 자리를 마련하는 데 실패한 지도자는 업적을 남기기 어렵다.
시민들의 참여를 멋지게 이끌어낸 지도자로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먼저 꼽힌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오늘 새로운 변경의 모서리에 서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 변경이 미지의 기회들과 위험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지적했다.
‘새로운 변경(new frontier)’은 개인에게나 사회에나 필요하다. 아서 클라크의 얘기를 빌리면 “우리는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모험, 다양성, 새로움, 낭만이 필요하다.” 케네디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변경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꿈에 동참하도록 하는 데 멋지게 성공했다.
이어 취임 연설에서 그는 “당신의 나라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으시오”라고 요구했다. 시민들에게 나아갈 길을 보이고 그 길을 가는 데 필요한 헌신적 자세를 요구한 것이다. 시민들에게 높은 도덕을 요구하지 않는 지도자는 시민들의 잠재력을 이끌어 낼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의 갈리폴리 전투에서 케말 파샤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나는 귀관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귀관들에게 죽으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 명령을 받은 터키 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예상을 깨고 영국 군을 물리쳤다.
이제 박 대통령은 자신이 제시한 목표에 시민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시민들의 심적 에너지를 모을 만한 일로는 우리 사회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드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낮은 도덕적 수준은 세월호 사고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반적 부진의 근본적 요인이다. 박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물론 그 일은 쉽지 않다. 상상력과 대담성이 아울러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갑자기 터진 ‘성완종 추문’이 정국을 휩쓰는 터라 그런 과업을 추진하기가 한결 어려워졌다. 그러나 지금 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중앙은 밀리고 우익은 후퇴합니다. 상황이 멋집니다. 공격하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페르디낭 포쉬가 프랑스 군 사령관 조제프 조프르에게 올린 보고다. 밀리는 상황에선 거의 언제나 과감한 반격이 최선이다.
복거일 < 작가·사회평론가 eunjo35@naver.com >
서울 둘레길을 따라 진달래가 다시 피었다. 잎새가 나오기 전에 먼저 피는 분홍 꽃은 애잔해서 헤어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월의 시에서도, 이흥렬의 노래에서도 진달래는 헤어짐을 상징한다. 그 꽃잎들에 앳된 얼굴들이 겹친다. 이어 물음이 나온다. “한 해 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나?”
한 해 전 우리는 다짐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하고 맑은 사회로 만들자고. 온 나라가 슬퍼하는 비극은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어떤 감정보다 깨끗해서 상처를 씻어 아물게 하고 재앙을 극복하는 심적 자산이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심적 자산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흩어지도록 했다. 갖가지 안전사고가 일깨워주는 것처럼 그때보다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진 것도 아니고, 잇달아 나오는 추문이 가리키는 것처럼 더 맑아진 것도 아니다.
실은 문득 진 꽃들을 절제된 태도로 애도하는 지혜도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유족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일마다 의견을 달리했다. 끝내는 유족 대표들이 가난한 대리운전사를 폭행해서 기소되고 위세를 부린 야당 국회의원은 공범으로 수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다 우리는 이런 상황으로 몰렸는가.
지난해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의 침몰은 여러 요인이 겹쳐서 일어났다. 그 요인들은 본질적으로 도덕심의 부족에서 나왔다. 낡은 배를 사서 취미를 즐기려고 회삿돈으로 한 층을 더 쌓아서 배를 위태롭게 만든 해운회사의 사주, 무리한 개축을 ‘적재 화물을 크게 줄인다’는 조건으로 허가해서 자신들의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한 선박 전문가들, 과다 적재를 강요한 해운회사 실무자들, 안전 점검을 아예 하지 않고 서류만 꾸민 여러 감독기관 요원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도덕심이 부족한 선장과 선원들…. 이들 가운데 최소한의 도덕심을 지닌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 배는 많은 승객과 함께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정부는 사고를 수습하는 절차를 밟으면서 우리 사회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드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세월호 사고가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낮은 도덕적 수준에서 나오는 갖가지 사건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사회를 보다 안전하고 맑게 만든다는 목표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법과 조직을 바꾸는 일에 매달렸다. 느닷없이 해양경찰청을 없애고 국민안전처를 새로 만들었다. 늘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며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을 목숨을 걸고 막아내는 해양경찰 조직을 단 한 번 미흡했던 책임을 물어 없앤 것은 정의롭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국민안전처를 새로 만들면 정부가 커져서 세금은 분명히 더 들지만 시민들이 더 안전해질지는 확실치 않다.
진단이 그르면 옳은 처방도 좋은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해양경찰청을 해산할 만큼 정부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면 궁극적 책임은 당연히 대통령이 져야 한다. 여러 요인들이 겹쳐서 일어난 교통 사고가 제대로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정부와 대통령의 책임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 뒤로 세월호 사고에 관련된 일들에서 정부와 대통령은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정부의 조직 변경으로 대책이 마련됐다는 논리가 서자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인다는 근본적 대책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 시민들의 마음에서 일었던 슬픔의 깨끗한 에너지는 좋은 목적에 쓰이지 못한 채 그냥 흩어졌다. 한국이라는 배가 힘차게 항해에 오르도록 터빈을 돌릴 수 있었던 뜨거운 증기가 헛된 김으로 새어 나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는 목적항도 잊고 항로도 모르고 추진력도 잃은 채 표류하는 배처럼 됐다. 모든 행사들이 취소되고 모든 사람들이 고개 숙이고 몸을 낮추었다. 자연히 경제는 침체했고 정국은 ‘유족의 뜻’을 내세운 세력이 주도했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면 세월호를 인양하겠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얘기에서 이런 사정이 괴롭게 드러난다. 전문가 얘기를 들을 것도 없이 세월호 인양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비록 선체가 크고 물살 거센 해역의 뻘에 묻혔지만 얕은 바다에 침몰한 배를 건져 올리는 일은 기술적으로 간단하다. 진정한 논점은 ‘과연 그 배를 지금 건져 올리는 것이 타당한가’다. 기술적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문제다. 건져 올리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고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데 혜택은 분명치 않으니, 생각 깊은 사람들이 망설이는 것이다.
만일 야당 지도자들이 늘 강조해온 것처럼 ‘유족의 뜻’이 세월호와 관련된 모든 일들에서 최고의 지혜고 가치라면 박 대통령은 명확히 말했어야 했다. “무슨 비용이 들고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도 세월호를 인양하겠다”라고. 그렇지 않고 합리적으로 비용과 혜택을 계산해야 한다고 여겼다면 그 계산의 결과를 내놓고 시민들의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자신에 관한 추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느라 적극적으로 사회적 논의를 주도하지 못했다. 그동안 세월호 인양에 관한 논의들이 자주 나왔지만, 정부는 단 한 번도 주도적으로 전문가들 의견을 모아서 합리적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긁어 부스럼’을 피하자는 태도만 보였다. 그런 태도가 안은 치명적 위험은 목청이 큰 사람들의 주장에 휘둘려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다.
비용-편익 분석을 하지 못한 채 인양하기로 결정이 나는 바람에 ‘인양한 뒤엔 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는 정작 논의도 안 됐다. 비용-편익 분석의 편익에서 가장 큰 부분이 바로 건진 배의 활용이다. 그런 분석이 없었으니 활용에 대한 논의도 나올 수 없었다. 원래 낡았던 데다 바닷속에 두 해 동안 잠겼을 터이니 막상 건져 올린 뒤의 배는 보존도 활용도 어렵다. 그렇다고 버리기도 쉽지 않다. 다 삭은 선체를 어떻게 하자는 얘기인가? 세월호 인양은 천안함 인양과는 성격과 목적이 전혀 다르다.
이제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박 대통령은 무기력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관료주의적 처신에서 훌쩍 벗어나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어느 회의에서나 박 대통령은 적어온 것을 낭독하고 당부하는 것으로 시종한다. 토론도 질문도 없다. 장관들도 비서관들도 관객에 지나지 않는다. 혼자만의 무대는 화려한 것이 아니라 적막한 것이다.
시민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사회적 과업에 시민들이 참여할 자리를 마련한 적이 없다. 세월호 사고 수습 과정에서도 시민들은 관객에 지나지 않았다. 관객이 된 시민들이 뜨겁게 반응할 리 없다. 시민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할 자리를 마련하는 데 실패한 지도자는 업적을 남기기 어렵다.
시민들의 참여를 멋지게 이끌어낸 지도자로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먼저 꼽힌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오늘 새로운 변경의 모서리에 서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 변경이 미지의 기회들과 위험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지적했다.
‘새로운 변경(new frontier)’은 개인에게나 사회에나 필요하다. 아서 클라크의 얘기를 빌리면 “우리는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모험, 다양성, 새로움, 낭만이 필요하다.” 케네디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변경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꿈에 동참하도록 하는 데 멋지게 성공했다.
이어 취임 연설에서 그는 “당신의 나라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으시오”라고 요구했다. 시민들에게 나아갈 길을 보이고 그 길을 가는 데 필요한 헌신적 자세를 요구한 것이다. 시민들에게 높은 도덕을 요구하지 않는 지도자는 시민들의 잠재력을 이끌어 낼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의 갈리폴리 전투에서 케말 파샤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나는 귀관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귀관들에게 죽으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 명령을 받은 터키 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예상을 깨고 영국 군을 물리쳤다.
이제 박 대통령은 자신이 제시한 목표에 시민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시민들의 심적 에너지를 모을 만한 일로는 우리 사회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드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낮은 도덕적 수준은 세월호 사고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반적 부진의 근본적 요인이다. 박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물론 그 일은 쉽지 않다. 상상력과 대담성이 아울러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갑자기 터진 ‘성완종 추문’이 정국을 휩쓰는 터라 그런 과업을 추진하기가 한결 어려워졌다. 그러나 지금 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중앙은 밀리고 우익은 후퇴합니다. 상황이 멋집니다. 공격하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페르디낭 포쉬가 프랑스 군 사령관 조제프 조프르에게 올린 보고다. 밀리는 상황에선 거의 언제나 과감한 반격이 최선이다.
복거일 < 작가·사회평론가 eunjo35@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