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전 '나부터…' 배제하고 상대방의 결정권 배려하라
지난 주말 요즘 대세로 꼽히는 TV 육아프로그램 ‘오 마이 베이비’를 보게 됐다. 네 살 아이와 아빠가 승강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협상은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상황은 이랬다. 시골 마을에 놀러 간 아이와 아빠가 문패를 만들었다. 문패를 달기로 하고 문 앞에 나가서 아이에게 물었다. “여기에다 문패를 달까”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기…” 문밖을 가리켰다. 아빠는 아이 의견을 존중하며 문 밖으로 나가 다시 물었다. “여기에다 달까” 아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한참을 승강이했고 결국 중도에서 아이의 주장을 무시한 채 문패를 설치했다.

이는 재미있는 협상 상황이다. 아이와 아빠가 하나의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만 합의를 제대로 이끌지 못했고, 그 과정도 쉽지 않았다. 아이는 왜 아빠의 제안을 그렇게 여러 번 거절했을까. 아이가 거절한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아이가 원하는 장소가 정말 마을 밖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이가 다른 일로 아빠에게 삐쳐서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패를 어느 정도 거리에 두어야 하는지 몰라서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협상 심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한 가지 이유를 유추해 낼 수 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할인점에 갔던 적이 있다. 커피 메이커를 사기 위해 여러 모델을 비교해 보고 싶었다. 전자제품 코너에서 다양한 제품을 보고 있으려니 판매원이 다가왔다. 설명을 가만히 들어보니 판매원은 자신이 팔고 싶어하는 제품이 있었다. 구매자를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은근히 자신이 원하는 제품 구매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아내는 물건을 고를 때 옆에서 강권하는 것을 싫어한다. 물론 필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살 물건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싶어한다. 판매원이 결정한 물건을 사겠다고 할 고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율적인 결정을 바라는 마음은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딱히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고객의 이런 마음을 읽지 못하는 판매원들은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되는 제품을 팔려는 욕심에서 구매를 강요한다. 고객들은 당연히 구매를 포기하고 판매원의 실적은 낮아질 것이다. 고객은 편안하게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골라보고, 모를 때에 물어보면 친절하게 안내하는 판매원을 더 좋아한다. 고객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그런 기회를 주는 상대방과 거래하고 싶어한다.

아이가 아빠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빠가 제안한 장소는 이미 아빠가 결정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이는 아빠가 제시하는 장소는 계속 거절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물론 아빠는 아이의 의견을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아이는 막연히 “저~기…”만을 말하며 아빠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협상도 마찬가지다. 협상가들은 자신들이 결정한 사항을 상대방에게 받아들이라고 제시한다. 상대방의 생각은 어떨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결정이 아니다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에 일단 반대한다. 그 제안이 마음에 드는 경우에도 일단 거절하고 다시 생각하는 경우까지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양측이 모두 이런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제안을 하면 일단 거부하고 자신이 결정한 제안을 내세운다. 그러면 상대방도 거절하고 다시 자신이 결정한 제안을 내세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협상이 어려운 상황으로 빠진다. 물론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이 되면 합의하겠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상대방의 자율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자율성을 고려하는 제안이란 어떤 것일까. 다중 제안을 활용하면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일을 쉽게 풀어갈 수 있다. 하나를 제안하면 상대방에게 받아들이라는 뜻이 되지만, 여러 개의 제안을 동시에 하면 상대방에게 결정할 권리를 준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상대방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결정한다는 생각에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빠는 아이에게 어떻게 제안해야 했을까. 먼저 서너 군데의 후보지를 아이에게 권하고,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시간을 주었어야 한다.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아이는 조금 생각해 보다가 한 곳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빠가 결정한 것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계평 < 세계경영연구원(IGM)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