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연극 ‘아버지’가 우리 시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연극 ‘아버지’가 우리 시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영화와 TV 드라마에 이어 연극에서도 ‘아버지 바람’이 거세다. 영화 ‘국제시장’, TV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 등으로 ‘가족에 헌신하는 아버지’가 최근 국내 대중문화계의 흥행 코드로 떠올랐다. 연극계에서도 철없는 아버지, 가정에서 소외된 아버지 등 우리 시대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하는 작품이 잇따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연극계의 ‘아버지 트렌드’ 중심에는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63·공연기획사 선아트컴퍼니 대표)이 있다.

김 전 장관은 19일 막을 내린 마당 퓨전극 ‘아빠 길들이기’에서 철부지 심봉사를 열연한 데 이어 다음달 1일부터 공연하는 연극 ‘아버지’에선 가족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아버지를 연기한다. 그동안 영화와 TV 드라마에는 꾸준히 모습을 비쳤지만 연극배우로 무대에 서는 것은 16년 만이다.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에서 ‘아버지’ 공연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났다.

▷오랜만에 배우로서 무대에 서니 어떻습니까.

“20~30대에는 주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85년 극단 아리랑을 창단한 이후로는 극작과 연출, 제작을 하며 이따금 배우도 겸했습니다. 1999년 ‘유랑의 노래’ 출연을 마지막으로 연출만 했죠. 무대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떠나 있었으니 무척 겁이 나고 긴장했어요. 권투 코치를 하다가 16년 만에 선수로 링에 복귀한 셈이니까요. 운동 등으로 체력을 기르는 데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아빠 길들이기’에서는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많이 뛰어다니고, 쓰러지고 하거든요. 같이 뛰는 젊은 배우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남모르게 많이 노력했습니다.”

▷2007년 장관 퇴임 후 영화와 드라마에는 꾸준히 출연하셨죠.

“영화와 TV는 제가 하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제안이 왔어요. 국립극장장과 장관을 하면서 연기를 8년간 쉬었으니 제 자신을 점검해 보자고 생각했고 젊은 감독, 제작진과 촬영장에서 같이 작업하는 경험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기회를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무대에선 제가 하고 싶은 작품들을 만들고 제작하다 보니 연출에만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연기까지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어요.”

▷두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아빠 길들이기’ 연출가가 작품 속 심봉사는 제가 적임자라며 캐스팅 제의를 하더군요. 내심 기뻤습니다. 영화와 TV를 하다 보니 연출과 극작뿐 아니라 연기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거든요. ‘내가 하겠다’고 나서기엔 쑥스럽던 차에 못 이기는 척 수락했죠.(웃음) ‘아버지’는 2012년 초연한 작품으로 이번에 동양예술극장 개관작으로 선정됐는데, 극장장이 제게 직접 출연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두 작품 다 주인공 아버지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아버지 시리즈’가 됐네요. ‘아빠 길들이기’는 원작 제목이 ‘효녀 심청’인데 기획팀에서 아버지 이야기로 바꾸자고 했어요. 시대적 관심이 효녀보다는 자기 욕심에 눈 먼 아버지에게 있다고 보고, 심봉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거죠. ‘아버지’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제가 한국 상황에 맞게 번안해 대본을 만들고 연출한 작품입니다. 해고당한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를 위장해 백수 아들에게 보험금을 물려주고 죽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초연 때만 해도 ‘아버지 코드’가 주목받던 시기가 아니었는데요.

“대학 때부터 ‘세일즈맨의 죽음’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제 제가 그 아버지 나이가 된 거예요. 주변에서도 직장과 가정에서 밀려나고 사회적 시선에서도 비켜나 있는 우리 시대 아버지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결정적인 영감은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마종기 시인의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라는 시에서 얻었어요. 시는 극에서 중요한 대사로 차용됩니다. 극 중 아버지는 ‘국물만 우려낸 멸치 꼬락서니로 죽을 순 없지 않나’고 말하고, 어머니는 막바지에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독백합니다. ‘국물만 낸 멸치 같은 당신 이제는 저 세상에서 싱싱하게 헤엄쳐라’고.”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연극을 통해 이 시대 아버지들을 위로하고 싶은 건가요.

“젊어서 연극할 때는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회운동적 차원의 기능에 초점을 맞췄으나 요즘은 연극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그들의 삶을 때로는 위로할 수 있는 기능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고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속에 당대 문제와 이슈가 잔뜩 담겼으면서도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의 본질을 깊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위기, 가족 간 애증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조금이라도 치유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두 아버지 역할에서 실제 모습과 겹치는 부분도 있을 텐데요.

“심봉사는 원래 성격이 철없고 순진한데 저는 예술을 한다고 철없는 행동을 많이 했죠. 예술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좀 불안정하잖아요. 아들이 초등학교 때 아빠 직업을 백수라고 쓴 적도 있어요. ‘아버지’처럼 자식들에게 소리 지르고 엄한 측면도 있지만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버지’ 연습을 보러 온 아내는 ‘평소 모습이 너무 많이 드러나니 실제처럼 하지 말고 연기를 하라’고 하더군요.(웃음)”

▷전직 장관이란 타이틀이 예술활동에 도움이 됩니까.

“도움 되는 건 없고 불편한 것만 많죠. 같이 작업하는 현장 예술가들이 저를 대할 때 어려워하기도 하고, ‘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분 바르고 왜 저러나’ 하는 시선을 느낄 때도 많아요. 행정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게 어떻게든 극작과 연출에 도움을 주지 않겠습니까. 제 삶의 모델은 괴테입니다. 괴테는 젊은 시절 배우도 하고 극단을 만들어 연출도 했고, 바이마르공화국의 장관과 총리도 지내는 등 여러 일을 하다가 결국 ‘파우스트’로 돌아왔죠. 20대에 쓴 미숙한 초고를 계속 다듬고 보완해 80세에 불후의 명작을 남겼어요. ‘파우스트’ 2부에는 그의 행정, 통치 경험이 반영돼 있습니다. 저도 계속 작품 만드는 일에 정진하다 보면 80세쯤, 아니 90세쯤 명작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연극 문학 등 문화예술계와 정부 지원기관 간 갈등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정부에서 문화예술계 현장의 애로사항이나 요구를 좀 더 경청하고 반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문화예술 예산을 늘리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죠. 어차피 한정된 예산을 어떻게 쓰느냐가 정책 방향인데 제가 장관할 때만 해도 문화정책 기조가 소액이라도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는 거였는데 요즘은 ‘되는 쪽으로 몰아주기’로 바뀐 것 같습니다. 효율을 따져 되는 쪽을 더 잘 되게 하겠다는 거죠. 하지만 상업문화나 대중문화 등 시장이 형성된 분야는 정부가 굳이 관여하지 않아도 돼요. 전통예술이나 기초예술 등 상업성은 떨어지지만 문화적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는 분야를 지원하는 게 정부가 할 일입니다.”

▷올 들어 삼일로창고극장, 대학로극장 등 전통 있는 소극장이 잇따라 문을 닫았습니다.

“소극장을 운영하는 주체에 대한 지원책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건물주에 대한 세제 혜택이 아니라 시설 보수, 인건비 등 극장 운영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 상업성이 떨어지지만 실험성과 예술성을 추구하는 창작 행위가 이뤄지는 공간을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공연 실적과 내용 등을 평가해 위기에 몰린 곳을 긴급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합니다.”

김명곤 前 장관은…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무대 인생은 서울대 독어교육과 2학년 때 친구를 따라 사범대 연극반에 놀러 가면서 시작됐다. 괴테를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이던 그는 “내가 좋아하는 문학과 음악과 낭만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판소리, 탈춤 등 그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전통예술을 처음 접하고 익힌 곳도 대학 연극반이었다. 그는 ‘우루왕’ ‘유랑의 노래’ 등 전통예술을 현대적인 극양식에 융합한 작품을 주로 만들어 왔다. 대학로에서 이장호 감독에게 캐스팅돼 ‘바보선언’(1983년)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가 대본을 쓰고 주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년)로 명성을 얻었다.

△1952년 전주 출생 △전주고 졸업 △서울대 독어교육과 졸업 △배화여고 교사 △극단 아리랑 창단 대표 △국립중앙극장 극장장 △문화관광부 장관 △선아트컴퍼니 대표 △동양대 연극영화과 석좌교수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송태형/선한결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