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 가슴 파고든 시적 언어…역시 셰익스피어
폭 8m의 경사진 무대가 줄에 묶인 채 허공에서 흔들리고, 무대 위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대지’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백발의 리어왕은 흠뻑 젖은 채 소리친다. “비야 쏟아져 내려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너 천둥아, 이 세상 둥근 땅덩이를 납작하게 때려라! 창조의 모태를 부수고 배은망덕한 인간의 씨를 말려버려라.”

두 딸에게 배신당하고 황야로 쫓겨나 저주를 쏟아붓는 리어의 대사는 사납고 거칠지만, 그 언어는 역설적으로 시적이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리어왕’(국립극단 제작·윤광진 연출·사진)은 원작에 충실한 연출만으로 관객에게 큰 울림을 준다. 텅 빈 무대에서 시작되는 극은 현대적 재해석이나 별다른 연출 기교 없이 셰익스피어의 광기 어린 언어 그 자체에 집중한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은 브리텐의 노쇠한 왕 리어가 믿었던 두 딸에게 쫓겨나며 광인이 돼가는 모습을 그린다. 리어의 노여움을 사 추방당했던 막내딸 코딜리어가 아버지와 함께 언니들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결국 리어와 세 딸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리어를 연기하는 장두이는 미쳐가는 왕의 불안정한 심리를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광포하게 표현한다. “복수의 먹구름이 밀려온다. 빗물아 두 딸의 자궁 속으로 흘러가 태아를 불구로 만들어라”며 저주를 퍼붓다가도 “벌거벗은 인간은 두 발 달린 짐승에 불과하구나”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에서 왕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한 남자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원작보다 비중이 커진 광대의 역할도 인상적이다. 리어의 심리를 대변하며 해설자 역할을 하는 광대는 극의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사제들이 행동보다 말이 앞설 때, 술장수가 누룩에 물을 섞어 빚을 때 … 사채업자가 거리에서 돈을 셀 때, 포주와 창녀들이 교회를 세울 때, 그때가 되면 이 세상에 혼란이 올 거야.” 광대는 무대에서 내려가 객석을 배회하며 자신의 예언을 극장 문밖으로 확장시킨다. 윤광진 연출은 “광대의 비판과 깨우침은 셰익스피어가 살던 사회뿐 아니라 현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며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비관적이고 황량하지만 그 속에 사회에 대한 각성과 눈부신 성찰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캐내면 캐낼수록 흥미진진한 언어”라는 장두이의 표현대로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감상하다보면 170분(중간 휴식 15분 포함)이 훌쩍 지난다. 시적 표현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극을 직접 번역한 연출가의 노고가 빛을 발한다. 내달 10일까지. 2만~5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