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0일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화장품·향수 면세점 개장 기념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이부진(가운데) 호텔신라 사장.
지난 2월 10일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화장품·향수 면세점 개장 기념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이부진(가운데) 호텔신라 사장.
롯데와 신라는 이미 세계적인 사업 규모와 경쟁력을 갖춘 면세 사업자로 성장했다. 면세점 전문지 TR비즈니스가 2013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롯데면세점(Lotte Duty Free)의 판매액은 33억 달러로 세계 4위다. 신라면세점(Shilla Duty Free)은 19억 달러로 8위에 올라 있다. 두 기업의 판매액을 합치면 52억 달러에 달한다. 세계 1위인 미국 DFS그룹의 판매액(46억 달러)을 뛰어넘는 액수다.

두 기업의 성장세도 괄목할만하다. 롯데는 2012년 대비 13.8%, 신라는 동기 대비 8% 성장했다. 전년 대비 판매액 증가율로만 따지면 롯데는 세계 2위, 신라는 4위에 올랐다. TR비즈니스는 지난해 한국의 전체 면세 판매액이 79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은 이미 세계 면세점 산업을 이끄는 핵심 축으로 성장했다. 롯데와 신라의 경쟁을 통해서다.

M&A로 글로벌 톱 2 노리는 롯데

국내 면세점 사업의 양강인 롯데와 신라의 경쟁은 해외에서도 불붙고 있다. 국내시장이 갈수록 포화 상태를 맞으면서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하는 사정은 면세점도 마찬가지다. 해외시장 개척의 포문을 먼저 연 곳은 롯데다. 롯데는 2012년 1월 인도네시아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에 900㎡ 규모의 면세점을 열며 본격적인 해외 공략에 나섰다. 향수·화장품·주류·담배 등 기본 품목 외에도 120여 개의 명품 브랜드를 판매한 수카르노하타 공항점은 그해 공항 매출 1위를 달성하며 성공적인 론칭을 알렸다.

2012년 5월에는 싱가포르 창이공항 제2터미널에 80㎡ 규모의 토산품 전문 매장을 열었다. 홍삼 등 건강기능식품과 기능성 화장품이 주요 판매 품목이다. 이어 11월에는 창이공항 제1터미널에 불가리·몽블랑·보테가베네타 등의 명품 브랜드를 판매하는 잡화 매장을 300㎡ 규모로 오픈했다.

공항 면세점 사업으로 자신감을 얻은 롯데는 곧장 시내 면세점 개척에 나섰다. 2013년 6월 문을 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시내 면세점이 대표적이다. 자카르타 시내 중심부인 쿠닝한 지역에 자리한 롯데면세점의 규모는 5000㎡에 달한다. 롯데쇼핑에비뉴 4~5층 전체를 면세점으로 꾸몄고 130여 개에 달하는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공격적인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작년 7월 23일에는 미국의 괌공항에 2250㎡ 규모의 대형 매장을 열었다. 롯데의 괌공항점 개장은 국내 면세점 산업의 획을 그은 사례로 평가된다. 국내 면세 사업자가 외국 공항의 전체 면세 사업 운영권을 처음 따낸 사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괌공항 면세점은 세계 최대 기업인 DFS와의 경쟁을 뚫고 사업권을 획득해 더 의미가 컸다. DFS는 그전까지 30년 이상 괌공항 면세점 운영권을 독점해 왔다. 롯데는 2014년 9월 일본 간사이공항점도 문을 열었다. 330㎡ 규모로 화장품·패션잡화·전자제품·시계 등을 판매한다. 간사이공항점은 롯데와 간사이에어포트에이전시(KAA)의 공동 운영 체제다.

롯데는 앞으로도 해외 진출을 통해 면세점 사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해외시장 진출뿐만 아니라 기존 시장 강자들과의 인수·합병(M&A)을 통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톱 면세 사업자로 부상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면세 사업 부문의 M&A 실적은 신통치 않다. 롯데는 지난 2월 세계 6위 면세 사업자인 월드듀티프리(이탈리아) 인수에 나설 것이라고 발표했다. 월드듀티프리의 세계 면세 시장점유율은 6.9%다. 롯데가 최대 주주사인 에디지오네의 지분 50.1%를 전량 인수한다면 세계 시장점유율이 단숨에 14.53%까지 뛰어오르게 된다. 세계 1위인 듀프리(14.8%)를 턱밑까지 추격할 수 있는 규모다.

하지만 롯데면세를 글로벌 빅 2로 키우려는 신 회장의 계획은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롯데쇼핑은 지난 4월 15일 보도 자료를 통해 “롯데그룹에서 월드듀티프리 인수를 추진해 왔지만 월드듀티프리가 다른 회사와 매각 협상을 진행해 롯데그룹과 협상이 불가하다는 뜻을 전해 왔다”며 “롯데그룹은 월드듀티프리 인수를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롯데가 말한 다른 회사는 스위스의 듀프리다. 듀프리는 글로벌 판매액 면에서 이미 DFS에 이은 빅 2다. 듀프리의 월드듀티프리 인수로 세계 면세점 시장은 스위스와 미국의 양강 체제로 굳혀졌다.

해외 진출 시기는 롯데보다 조금 늦었지만 신라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신라면세점은 싱가포르 창이공항과 마카오국제공항을 중심으로 5개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신라는 2013년 1월 창이공항 제3터미널에 문을 연 26㎡ 규모의 보테가베네타 매장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의 막을 열었다. 롯데가 시작부터 900㎡ 규모의 중형 매장으로 시작한 데 비해 신라는 점차 사업 규모를 키워 가는 전략을 택했다.

신라, 창이공항 중심 5개 매장 운영

신라는 롯데가 이미 자리 잡은 창이공항 제1·2터미널을 피해 3터미널을 집중 공략했다. 2013년 3월 프라다 매장을 123㎡ 규모로 열었고 작년 1월에는 역시 제3터미널에 304㎡ 규모의 시계 편집 매장을 오픈했다.

창이공항 내 3개 매장 운영으로 탄력이 붙은 신라의 해외시장 개척은 지난해 1월 절정을 맞았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작년 2월 10일 열린 창이공항 향수·화장품 매장 오픈 기념식에 직접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가수 동방신기와 중화권 인기 배우 안젤라 베이비 등도 함께해 글로벌 ‘큰손’으로 부상한 중국 관광객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롯데, DFS 밀어내고 괌공항에 깃발
호텔신라는 창이공항 화장품·향수 매장을 2020년 9월 30일까지 운영할 예정인데, 해당 매장에서만 연간 30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특히 신라의 창이공항 입점은 듀프리·DFS벤처싱가포르·킹파워그룹홍콩·뉘앙스-왓슨 같은 세계적인 유통 공룡들을 제치고 얻어낸 성과였다. 이부진 사장은 회사 전체 매출의 90% 가까이를 차지하는 면세 사업을 직접 챙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창이공항 입점은 면세 사업의 해외시장 확대라는 목표 외에도 이 사장의 경영 능력을 입증한 사례로 꼽힌다.

이 사장의 공격적 행보는 해외 M&A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다. 호텔신라는 지난 3월 미국 자회사인 삼성호스피탈리카 아메리카를 통해 미국 기내 면세점 업체인 디패스를 인수했다. 호텔신라가 인수한 디패스의 지분은 44%로, 인수 금액만 1억500만 달러에 달하는 빅딜이었다. 신라는 5년 후 디패스의 지분 36%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콜옵션 계약도 맺었다. 디패스는 미국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내 면세점 전문 업체다.

신라의 디패스 인수는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권에 머물러 있던 국내 면세점 산업의 본격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의미한다. 급증하고 있는 중화권 관광객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시장의 성장은 앞으로도 지속되겠지만 세계 면세 비즈니스를 주도하고 있는 곳은 역시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지역이다. 실제로 면세 판매액 기준으로 글로벌 톱 10을 살펴보면 아시아권 국가로는 한국이 유일하다. 나머지는 미국·스위스·프랑스·독일·이탈리아·아일랜드 등 모두 서구권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BUSINESS 1012호 제공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