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화가로는 처음 전시회를 열고 있는 허영만 화백. 그는 “기다리는 독자가 있는 한 계속 그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화가로는 처음 전시회를 열고 있는 허영만 화백. 그는 “기다리는 독자가 있는 한 계속 그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렸다. 집안이 어려워 미술대학에 갈 수 없겠다는 이야기에 두 번 다시 생각지 않고 만화로 먹고살겠다고 결심했다. 지금까지 낸 작품은 215종. 만화 원화만 15만장을 넘는다. 요즘에는 ‘콘텐츠 창작가’라는 새로운 수식어도 얻었다. 그간 30개 이상의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 게임 등의 콘텐츠로 재탄생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소재로 한 식당가(식객촌)까지 생겼다.

그의 나이 예순아홉. 가난 때문에 서양화 공부를 포기했던 청년은 50년이 지난 올해 국내 최고의 공연·전시 공간인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만화’로 당당히 입성했다. 지난달 29일부터 한가람미술관에서 ‘허영만전(展)-창작의 비밀’을 열고 있는 만화가 허영만 화백이다. 7월19일까지 열리는 전시회에는 만화 원화와 드로잉 500여점이 걸렸다. 취재 내용과 아이디어를 메모한 쪽지, 이야기 뼈대를 만든 스토리보드 등도 볼 수 있다. ‘미생’의 작가 윤태호의 원화와 그가 허 화백 문하생 시절 그렸던 컷을 볼 수 있는 ‘사제전’도 함께 열리고 있다.

국내 만화 작가가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창작의 비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허 화백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게 없다. 그저 부지런히 일할 뿐”이라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만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예리하게 반짝였다.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를 연 감회가 어떻습니까.

“고맙지요. 이제는 만화도 예술로 인정받는구나 싶어요.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만화가 저급한 문화 콘텐츠로 취급당한 때가 있었어요. 어린이날이면 만화책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행사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돌아가신 대선배들이 예술의전당에서 만화 전시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박수를 칠 것입니다. 그래서 잘해야겠다는 각오가 더 커요. 제가 ‘1번 타자’니까요. 제2, 제3의 만화 전시회가 열릴 수 있도록 길을 내고 싶습니다.”

▷40년 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했지요. 문하생 생활을 거쳐 만화가로 정식 데뷔한 지는 40년이지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는 50년입니다. 첫 작품을 출간하고 3년 안에 이름을 알리지 못하면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1974년 데뷔 3개월 만에 낸 ‘각시탈’이 인기를 얻으면서 일을 계속하게 됐죠.”

▷동시대 작가 중 가장 오래 활동하는 비결이 뭡니까.

“저는 머리가 참 나빠요. 그래도 지금까지 버티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자신을 몰아붙였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서울 자곡동 작업실 곳곳에 좌우명을 붙여 놓고 자주 봅니다. ‘꾀부리지 마라’ ‘날고 긴다는 놈도 계속하는 놈은 못 당한다’…. 작업 시간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승부는 결국 책상 위에서 나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더디고 융통성이 없지요. 만화를 그리려면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서 방에다 또 써 붙인 게 ‘고정관념 탈출’입니다. 여전히 탈출은 못한 것 같아요. 하하.”

▷작품마다 철저한 취재와 세부 묘사로 유명합니다.

“어설픈 작품은 독자들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쉽게 알아볼 수 있으니 대충 만든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지요. ‘식객’을 그릴 때도 취재에 힘을 많이 썼습니다.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 많잖아요. 전문가들이 보기에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했죠. 전시 준비 중에 ‘식객’ 원고를 뒤적거리다 깜짝 놀랐어요. 앞으로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작품을 낼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요.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정말 막연한 일이에요. 그래서 만화가는 ‘곳간’에 아이디어가 많아야 합니다. 스케치북 겸 수첩을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바로 적고, 최대한 많은 내용을 기록해요. 한번은 수첩이 없어 음식점 냅킨에 고추장을 찍어 그림 메모를 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 모은 자료를 정리하는 데도 품이 많이 들어요. 아깝더라도 취재 내용을 솎아내야죠. 만화는 전문서적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는 것이니까요. 사람 사는 이야기 서넛에 전문적인 이야기 하나 정도를 넣습니다. 그게 이야기 연출이지요.”

▷흥행에도 신경을 쓰나요.

“굉장히 신경 쓰죠. 만화는 일단 재미있어야 해요. 독자들이 돈을 내고 보는데 작가한테는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줄 의무가 있지요. 작품 소재가 다양한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관상을 다룬 ‘꼴’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법한 소재를 썼습니다. 꼴대로 살다가 마는 건지, 개선할 방법은 없는 건지…. 내가 궁금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하더라고요. ‘식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루에 세 번 밥을 먹잖아요. 살면서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는 소재가 또 없지요.”

▷전시장을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많이 했다”고 쓴 문구가 있던데요.

“지금까지 그린 만화 제목 215개를 하나씩 적어 나가는데 ‘이것 참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화 문화가 겪은 불행한 시절을 보여주는 거예요. 저급 대량생산 체제로 가면서 한 달에 서너권씩 그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그렸죠. 그러다 보니 만화 원고료가 낮아졌지요. ‘만화공장 작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부릴 돈이 없으니 사라졌고요.”

▷요즘 만화업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변은 넓어졌어요. 하지만 만화 자체로 돈을 버는 것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특히 웹툰은 대부분 공짜로 제공하니까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요. 그래서 만화 내용이나 그림을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부류가 생겼어요. 작가가 그런 문제는 신경을 덜 쓰고 만화 자체를 재미있게 그리려고 애를 써야 하는데 가욋일이 너무 많죠. 만화 자체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돼야 합니다. 부가가치는 옆에서 만들어주는 거고요.”

▷웹툰이 작가들의 진입 장벽을 낮춘 대신 작품의 깊이가 덜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원고료가 낮다 보니 치열한 고민으로 대작을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신진 작가들이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여유가 없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웹툰도 많습니다. 저는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연재하는 ‘술꾼도시처녀들’을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애독자입니다. 작가들이랑 술 한번 먹고 싶어요, 허허.”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습니까.

“만화일기를 그립니다. 저녁에 집에 가서 수첩을 펼쳐놓고 ‘오늘 뭐 재미있는 일이 있었나’ 하며 쓱쓱 그려가는 거죠.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고은 선생의 ‘바람의 사상’이라는 책을 보고 시작했어요. 선생이 1970년대에 ‘오늘은 누구와 술을 마셨다’ 같은 일상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그중에 가끔 생각해볼 만한 말들이 있는데 저는 글 대신 만화를 그리면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이제 스물두권째 그렸는데 이번 전시에도 일부 소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인터넷에서 연재해볼까 해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그리고 싶은지요.

“작업에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날아라 슈퍼보드’ 같은 작품을 또 그릴 생각이 있는지 종종 물어들 보시는데 그 작품은 제 아이들이 어릴 적에 그렸어요. 이제 아이들이 컸으니 어린이 만화를 그릴 때는 지났습니다. 노인들 이야기를 할 나이가 됐지요. ‘실버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자식과의 관계라든지 성생활, 노년기의 새로운 도전 등을 내용으로 담을 수 있겠지요. 제가 지금껏 작업을 해온 것은 독자들 덕분입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무척 고맙고 행복해요. 잊히지 않기 위해서 꾸물거리기라도 해야죠. 만화를 그리는 게 지금도 즐겁습니다.”

■ 허영만 화백은…

허영만 화백은 성실함과 규칙적인 생활로 정평이 나 있다. 보통 오전 5시쯤 일어나 6시면 화실에 도착한다. 일찍 일어나야 하루를 길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 오전에는 신문을 읽고 오후 1시까지 작업에 몰두한다. 점심 후 낮잠은 45년 된 습관이다.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작업한 뒤 저녁 시간은 사람들을 만나며 보낸다. 술을 마시는 날이 많다. 다른 이들의 삶을 엿보면서 작품을 구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만화의, 만화를 위한, 만화에 의한’ 삶을 살다 가고 싶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1947년 전남 여수 출생 △여수고 졸업 △1966년 박문윤 문하에서 수학 △1974년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 공모전 당선(‘집을 찾아서’로 데뷔) △2001년 한국 대표만화가 10인 작품집 △2007년 제7회 고바우만화상 △2008년 대한민국 국회대상(만화·애니메이션 부문) △2009년 자랑스러운 전남인상 △2009년 서울 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시카프상

선한결/김보영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