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침묵하는 다수
최근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여야는 투표 전날까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야권 성향의 선거구가 많은 데다 온갖 악재까지 겹친 상황이어서 여당의 속은 더 새까매졌다. 그러나 결과는 여당의 압승이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도 그랬다. 여론조사 업체들은 이럴 때마다 예측 실패 원인을 ‘침묵하는 다수’에게 돌린다.

‘침묵하는 다수’는 독재정권 때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표현의 자유가 넘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장 흔한 분석은 독일 언론학자 노엘레 노이만이 얘기한 ‘침묵의 나선’ 이론이다. 자신의 견해가 우세 여론과 일치하면 적극 표출하고, 그렇지 않으면 침묵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여론은 소용돌이처럼 한 방향으로 쏠린다.

이는 ‘밴드왜건 효과’와 비슷하다. 서커스행렬 맨 앞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악대차(車)가 편승효과를 부추기면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다. ‘브래들리 효과’도 있다.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흑인 후보 톰 브래들리가 백인 후보를 이기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결과는 반대였던 데서 나온 말이다. 유권자들이 인종편견을 감추기 위해 흑인을 지지한다고 거짓 응답했던 것이다. 미국 경영학자 제리 하비는 애벌린에서 외식을 하자는 가족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폭염 속에서 고생한 일화를 빌려 이를 ‘애벌린 패러독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침묵의 나선’ 이론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에서도 적용된다는 조사 결과가 미국에서 나왔다. 목소리 큰 게 전체 여론인 양 둔갑하는 건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게 한국식 눈치보기나 냄비근성과 맞물리면 걷잡을 수 없다. 왜곡된 쏠림은 일그러진 ‘SNS 여론’을 낳는다. 통상 진보가 주류 담론인 시기에는 보수가 침묵하고, 보수가 주류 담론일 때는 진보가 침묵한다. ‘여론’이라는 말을 처음 쓴 루소가 지적했듯이 이는 ‘양식 있는 시민의 판단’보다 ‘모종의 분위기상 압력’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엊그제 끝난 영국 총선에서도 그랬다. 여론조사 결과 선거 직전까지도 어느 당이든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는 ‘헝(hung) 의회’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보수당의 압승이었다. 승리의 비결은 무상교육 같은 인기영합정책이 아니라 기업을 통한 성장정책이었다. 5년을 이어온 긴축정책을 3년 더 유지하겠다며 국민의 이해를 구한 게 핵심이었다. 이처럼 확고한 가치를 분명히 제시하는 정당에 말없는 지지로 답하는 게 곧 ‘침묵하는 다수’의 힘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