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연금파동, 새누리당의 지력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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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制가 정치 실패 초래
선진화法도 의사 능력을 무력화
의회 독재가 민주주의 죽이고 있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선진화法도 의사 능력을 무력화
의회 독재가 민주주의 죽이고 있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당(黨)이 국정을 주도하겠다”는 유승민 의원의 일갈이었다. 그러나 ‘당 주도론’은 금세 파탄 일로다. 연금 개혁 파동은 새누리당의 무지와 무능을 잘 드러냈다. 외견상으로는 김무성 유승민 개인의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정당은 그것에 속한 개인들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국정을 기획하기에 적합한 유사 행정조직이 아니다.
정당은 여론의 구심점이지 지식의 구심점이 아니다. 당은 이념 진영일 뿐 구체적 지식, 전문가적 지식, 현장 지식은 정부에 의존한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당의 독재에 반대해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을 분리해놓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행정부를 통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체로 나빠진다. 새누리당은 지식에서는 백치요, 이념에서는 난교 상태다. 후자는 경제민주화 혹은 사회적 경제 같은 더 큰 문제를 초래한다.
일당독재인 중국 공산당조차 지식은 정부에서 찾는다.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 개혁은 정부가 개혁안을 내면 입법부가 심의하는 절차라야 마땅하다. 국회는 종종 제멋대로 입법안을 내고 제멋대로 땅땅! 두드린다. 이번에도 제멋대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에 합의했다. 정당은 구조적으로 여론에 포획된다. 또 태생적으로 아마추어적이다. 이는 선거직이라는 존재 규정에서 오는 불가피성이다. 의원들은 교체되기 때문에 지식이 축적되지도 않는다. 새누리당은 더구나 준조폭 조직이다. 연공서열에다 호칭은 형님 동생이다. 지식 아닌 선수(選數)가 서열이다. 이 ‘봉숭아 학당’에서는 차기에 대한 권력의지만 넘쳐난다.
사회적 합의도 문제의 근원이다. 김무성 대표는 감개무량해 하면서 “사상 첫 사회적 합의”라는 점을 자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한 이래 사회적 합의는 정치 의사결정의 규범처럼 떠받들어져 왔다. 그러나 ‘합의’는 국가적 의사결정을 지연시키거나, 비전문성을 은폐하거나, 포퓰리즘을 극대화하는 언어 유희다. 더구나 보편적 이익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는 통로다.
연금 파동은 사회적 합의가 더는 국가 이성의 효율적 결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말았다. 사회적 합의는 마지막 이해관계자까지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암묵적 만장일치 방식이다. 그리고 치명적 약점을 드러낸다. ‘차카게 살자’ 같은 구호는 언제나 쉽게 합의에 도달한다. 하지만 무엇이 착한 것인지에 이르면 합의는 바로 사라진다. ‘합의’의 구조 하에서는 누구라도 알박기 횡포를 부릴 수 있다. 노동 개혁에서의 노총, 연금 개혁에서의 공무원노조는 합의 과정에서 비정상적 협상력을 가진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그 결과다. 합의제는 균질적인 소규모 집단의 방법론일 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따로 정치국을 두어야 하는 독재정치의 상부구조물을 의미할 뿐이다.
의결정족수를 단순 다수결에서 중(重)다수결인 60%로 끌어올린 소위 국회선진화법도 사회적 합의 이론에 따라 탄생한 제도다. 헌법이 규정한 단순다수결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위헌적이다. 60% 정족수는 합의에 참여하는 마지막 1인에 근접할수록 더 큰 의사결정력을 갖게 된다. 그게 ‘제멋대로인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양산되는 이유다. 정당들은 60%를 채우기 위해 막무가내인 저질 의원들을 더 잘 다독거려야 한다. 그들은 약간의 대가를 얻지만 필시 ‘합의의 수준’도 끌어내린다. 합의는 생물학의 최소량의 법칙처럼 갈수록 낮은 수준에서 결정된다. 바로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퇴행성 질환으로 변질되고 있다.
국회가 인민주의적 족쇄에서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김무성 대표가 철도 파업에서나 연금 파동에서 크게 헛발질을 한 것은 필시 개인의 지력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의회 독재, 의회 만능 하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국회는 입법기관일 뿐, 독재권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새누리당의 지력이 걱정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정당은 여론의 구심점이지 지식의 구심점이 아니다. 당은 이념 진영일 뿐 구체적 지식, 전문가적 지식, 현장 지식은 정부에 의존한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당의 독재에 반대해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을 분리해놓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행정부를 통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체로 나빠진다. 새누리당은 지식에서는 백치요, 이념에서는 난교 상태다. 후자는 경제민주화 혹은 사회적 경제 같은 더 큰 문제를 초래한다.
일당독재인 중국 공산당조차 지식은 정부에서 찾는다.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 개혁은 정부가 개혁안을 내면 입법부가 심의하는 절차라야 마땅하다. 국회는 종종 제멋대로 입법안을 내고 제멋대로 땅땅! 두드린다. 이번에도 제멋대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에 합의했다. 정당은 구조적으로 여론에 포획된다. 또 태생적으로 아마추어적이다. 이는 선거직이라는 존재 규정에서 오는 불가피성이다. 의원들은 교체되기 때문에 지식이 축적되지도 않는다. 새누리당은 더구나 준조폭 조직이다. 연공서열에다 호칭은 형님 동생이다. 지식 아닌 선수(選數)가 서열이다. 이 ‘봉숭아 학당’에서는 차기에 대한 권력의지만 넘쳐난다.
사회적 합의도 문제의 근원이다. 김무성 대표는 감개무량해 하면서 “사상 첫 사회적 합의”라는 점을 자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한 이래 사회적 합의는 정치 의사결정의 규범처럼 떠받들어져 왔다. 그러나 ‘합의’는 국가적 의사결정을 지연시키거나, 비전문성을 은폐하거나, 포퓰리즘을 극대화하는 언어 유희다. 더구나 보편적 이익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는 통로다.
연금 파동은 사회적 합의가 더는 국가 이성의 효율적 결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말았다. 사회적 합의는 마지막 이해관계자까지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암묵적 만장일치 방식이다. 그리고 치명적 약점을 드러낸다. ‘차카게 살자’ 같은 구호는 언제나 쉽게 합의에 도달한다. 하지만 무엇이 착한 것인지에 이르면 합의는 바로 사라진다. ‘합의’의 구조 하에서는 누구라도 알박기 횡포를 부릴 수 있다. 노동 개혁에서의 노총, 연금 개혁에서의 공무원노조는 합의 과정에서 비정상적 협상력을 가진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그 결과다. 합의제는 균질적인 소규모 집단의 방법론일 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따로 정치국을 두어야 하는 독재정치의 상부구조물을 의미할 뿐이다.
의결정족수를 단순 다수결에서 중(重)다수결인 60%로 끌어올린 소위 국회선진화법도 사회적 합의 이론에 따라 탄생한 제도다. 헌법이 규정한 단순다수결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위헌적이다. 60% 정족수는 합의에 참여하는 마지막 1인에 근접할수록 더 큰 의사결정력을 갖게 된다. 그게 ‘제멋대로인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양산되는 이유다. 정당들은 60%를 채우기 위해 막무가내인 저질 의원들을 더 잘 다독거려야 한다. 그들은 약간의 대가를 얻지만 필시 ‘합의의 수준’도 끌어내린다. 합의는 생물학의 최소량의 법칙처럼 갈수록 낮은 수준에서 결정된다. 바로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퇴행성 질환으로 변질되고 있다.
국회가 인민주의적 족쇄에서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김무성 대표가 철도 파업에서나 연금 파동에서 크게 헛발질을 한 것은 필시 개인의 지력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의회 독재, 의회 만능 하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국회는 입법기관일 뿐, 독재권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새누리당의 지력이 걱정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