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영국 대사관에 휘둘리는 서울시
지난달 29일 오후 기자에게 서울시 도시안전본부 관계자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잇달아 전화를 걸어왔다. 당시 기자는 서울시와 주한 영국대사관이 덕수궁 돌담길 개방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5월14일 체결한다는 사실을 취재한 뒤 보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 관계자는 “미리 보도되면 영국대사관이 이를 트집 잡아 MOU를 파기할 수 있다”고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그는 “14일에 공식 기자회견과 함께 자세한 브리핑을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본지는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해 서울시의 보도 자제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보름 뒤인 14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찰스 헤이 주한 영국대사는 덕수궁 돌담길 회복사업 추진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그런데 서울시 설명과는 달리 MOU 체결은 비공개로 진행됐고, 공식 기자회견도 열리지 않았다.

시 도시안전본부 관계자는 “영국대사관 측이 모든 행사를 비공개로 진행할 것을 요구해왔다”며 “서울시가 아무리 설득해도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영국대사관 측과 협상을 벌인 또 다른 시 관계자는 “영국대사관 측이 모든 행사를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다”며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지적했다.

영국대사관 측에 연유를 물어봤다. 영국대사관 측은 “(덕수궁 돌담길 개방 MOU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여전히 초기 단계의 계획으로 모든 정보는 보도자료에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영국대사관 후문부터 정문까지 170m의 돌담길 구간은 그동안 시민 출입이 통제됐다. 대사관 후문부터 대사관 건물로 들어서는 100m 구간은 시 소유이지만, 영국대사관이 1950년대부터 도로를 점용하고 있다. “불법 점용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게 시의 설명이다.

영국대사관이 협상을 거부하면 개방할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 박 시장의 핵심 정책인 ‘덕수궁 돌담길 개방’을 이루려면 영국대사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영국대사관에 일방적으로 휘둘렸다간 덕수궁 돌담길 개방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영국대사관 측은 이번 MOU가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강경민 지식사회부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