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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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현지인 친구가 주말에 고향집으로 놀러오라고 초대했어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신원이 확실하니 큰맘 먹고 갔죠.”(윤지민 씨)

“여행하면서 만나는 그런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다음 사람을 소개해주기도 하고요.”(탁재형 PD)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동숭동의 한 카페. 팟캐스트(인터넷방송) ‘탁피디의 여행수다’ 녹음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게스트로 출연한 윤지민 씨는 서울시 관광사업과 한류담당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사표를 내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가 멕시코여행 이야기를 풀어놓자 사회를 맡은 탁재형 PD(42) 등은 적절한 여행 정보와 조언을 곁들여가며 맞장구를 쳤다.

탁피디의 여행수다는 최근 여행자 사이에서 가장 화제인 팟캐스트다. 출연자가 다양한 장소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방송을 진행한다. 여행지의 문화와 뜨는 장소, 주의점 등 다양한 여행 정보를 총망라해 알려준다. 지금까지 제주도부터 영국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브라질 페루 등 남미, 호주, 인도 등을 다뤘다. ‘귀만 있으면 떠날 수 있는 세계여행’ ‘여행교(敎)의 간증집회’는 팬들이 이 팟캐스트를 부르는 애칭이자 오프닝 멘트이기도 하다.

KBS ‘월드넷’과 ‘도전 지구탐험대’, EBS ‘세계테마기행’ 등 해외 다큐멘터리를 전문으로 만든 탁 PD가 이 팟캐스트를 시작한 건 2013년 1월부터. 그는 약 15년간 이 분야의 편집·연출을 하며 해외 다큐멘터리라는 한우물을 팠다. 최근 팟캐스트 진행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서 만난 증류주를 소개한 책 스피릿 로드 등을 펴내기도 했다. ‘여행 전도사’로 나선 그를 지난 12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은 현실이 될 수 없다”

해외 다큐멘터리 촬영은 예측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섭외해 놓은 취재원이 나타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현지에서 촬영 대상을 정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는 애초에 미리 연락할 곳조차 없다. 그는 이런 일을 하게 될 줄 예상했을까. 답은 “그렇다”였다.

“학군단(ROTC)에 복무할 때 종이 한 장에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이 있었어요. 당시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조연출과 조수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는 그림을 그렸어요. 방송 일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똑같더라고요.”

탁 PD는 어렸을 적 막연히 외국생활을 동경했다. 신문·방송과 관련된 일을 하면 해외에 나갈 기회가 많을 것 같았다. 고교 2학년 때부터 신문방송학과 진학은 마음속에서 기정사실이 됐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93학번으로 입학해 방송을 제작하는 학교 동아리 ‘KUTV’에 들어가면서 천직을 찾았다. 입학식과 졸업식 등 교내 행사를 도맡아 촬영하는 동아리였다.

“당시 학교에서 최신 기자재를 장만해 줘서 대학생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장비를 다룰 수 있었어요. ENG카메라(휴대용 방송카메라)로 방송사 드라마국에서도 쓰기 어려웠던 ‘베타캄 SP’ 장비를 사줬으니까요. 촬영부장인 제가 그 카메라를 들고 나가면 방송사에서 의아하게 보곤 했죠.”

한시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이유다. 수업은 필수적인 것만 들었다. 졸업할 무렵이 되니 자연스럽게 촬영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직업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상상할 수 없는 건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어요. ROTC를 거치면 대기업이나 금융권에서 우대를 해주곤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죠.”

방송사 대신 외주 제작판에 투신

진로를 정한 그는 ‘직선 주로(走路)’를 택했다.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방송사 공채시험을 보는 대신 외주 제작판에 뛰어든 것이다. 빨리 영상을 만들고 싶었을 뿐, 시사상식 등 공채에 필요한 공부를 따로 할 생각이 없었다.

“고스톱 잘 치는 ‘타짜’가 포커판에 갈 필요 있나요. 지금 생각하면 사회를 몰라도 너무 모른 행동이었지만, 그땐 당장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어요.”

SBS아카데미에서 방송편집 기술을 배운 뒤 한 외주 프로덕션에 보조로 들어갔다. 보조로 들어간 지 1주일도 채 안 돼 편집감독으로 일하게 됐다. 통상 1~2년은 걸려야 달 수 있는 직함이었다.

2002 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출을 시작했다. 다큐멘터리업계의 산증인인 선배 김석원 PD는 무서운 사수였다. 탁 PD는 아직도 조연출로 첫 해외 촬영지인 이탈리아에 갔을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난생처음 본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라면을 끓였다가 엄청나게 혼났죠. 피곤한데 비난까지 이어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정식 PD로 KBS 월드넷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게 됐다. 물불 가리지 않는 취재가 이어졌다. 커피를 주제로 2000년대 초반 중국 현지촬영을 간 그는 촬영이 금지된 자금성 내에서 리포터까지 두고 촬영을 감행했다. “당시 리포터로 나섰던 한국인 아주머니가 바들바들 떨 정도로 겁을 냈어요.” 2005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한국식 룸살롱 취재를 갔다가 마피아를 만나 겨우 빠져나오기도 했다.

‘재미’ 좇아온 삶

오지 전문 PD로 이름나면서 여행 프로그램 패널로 참여하거나 PD리포트 방식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칠 기회가 생겼다. 세계테마기행에는 출연자로 등장해 페루 브라질 말라위 편 등에 출연했다. “이런 곳에 대해서는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당장 내일 어디부터 가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허심탄회한 PD 겸 출연자의 멘트는 생생한 여행의 ‘참맛’을 느끼기를 원하는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다 쉬어갈 때가 왔다. 2013년부터 스스로도 온전한 여행의 재미를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최근 방송을 쉬며 팟캐스트와 강연, 글쓰기 등에 집중하는 이유다.

그는 직구만을 던져서 독특한 이력을 쌓았다. 그 이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재미’다. 외국생활이 재밌어 보여서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고, 방송 동아리가 즐거워 밤낮없이 활동했다. 영상을 빨리 만들고 싶어 앞뒤 가리지 않고 외주제작사에서 시작했다.

“남들이 그래요. 어떻게 재미만 보며 사느냐고. 하지만 재미있는 것만 하며 살기에도 인생은 짧고 시간은 없는데, 왜 굳이 재미없는 걸 해요. 재미라는 건 비난받을 게 아니라 순수한 몰입을 가능케 하는 가치입니다. 젊은이들이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좇으며 살면 좋겠어요.”

여행과 인생의 공통점

계획대로 안 이뤄진다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둘 수 없다
즐겨라! 우연을


‘비포 선라이즈’는 남녀 주인공이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함께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다. 탁재형 PD는 “우연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가 여행과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여행이든 인생이든 계획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당황하지 말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정말 재미있고 가치있는 일과 마주칠 수 있다는 얘기다.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는 건 인생과 여행의 닮은 점이에요. 짜증이나 성을 낼 게 아니라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잘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좋은 투자입니다.”

방송 일도 마찬가지다. 그는 기억에 남는 현장 중 하나로 SBS ‘모닝와이드’에 내보내기 위해 취재를 갔던 신장위구르 지역을 꼽았다. 우루무치에서 급하게 정한 취재거리는 중국 본토에서 일하러 오는 젊은이들. 우연히 역에서 만난 장쑤성 출신 신혼부부가 현장에서 일자리 제의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계획 없이 취재했다. 서로 의지하며 시골로 떠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질박한 삶의 현장을 스케치할 수 있었다.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둘 수 없는 것도 여행과 인생의 공통점이다. 일단 집을 떠났으면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여행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된다. “기분 나쁜 채로 여행을 계속하면 집에 갈 때까지 우울해요. 지금 이 순간 기분 나쁜 감정을 털어버리고 여행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낫죠.”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