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생활 45년…그림은 삶의 숙제 푸는 도구죠"
전북 전주에서 유복한 가정의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1970년 간호보조원을 모집하는 신문광고를 보고 무작정 독일 함부르크로 떠났다. 그때 나이 스물넷. 함부르크병원에서 중환자와 행려병자 등 까다로운 환자를 보살피는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든 나날이었지만 1973년 국립 함부르크미술대에 진학했고, 1990년부터 20년간 이 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독일 함부르크와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서양화가 노은님 씨(69·사진)다.

오는 31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노씨는 “40여년의 힘겨운 이국 생활 동안 그림은 내게 ‘삶의 숙제를 푸는 도구’가 됐다”며 “어엿한 예술가로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했다.

노씨는 독일의 신표현주의 운동에 동참하면서 인간의 소통문제를 표현해 온 작가다.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딘스키의 직계 제자였던 한스 티만 교수를 만나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1986년에는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 거장들과 함께 ‘평화를 위한 전시회’에 참가했다. 4년 만에 연 이번 국내 전시에는 천진난만한 붓질과 강렬한 원색으로 꽃, 물고기, 나비 등을 묘사한 회화와 움직이는 조각 ‘모빌’ 등 60여점을 걸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에 전시된 서양화가 노은님의 ‘구름타기’.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에 전시된 서양화가 노은님의 ‘구름타기’.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세상을 안아주는 포용의 미학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도 ‘내게 긴 두 팔이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안아주고 싶다’로 정했다. 지난 3월 KBS 해외동포상 문화예술 부문상을 받았을 때 말했던 수상 소감에서 따왔다.

“저는 항상 벌 받는 사람처럼 때로는 무거운 짐을 진 채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 당나귀였습니다. 결혼도 못하고 혼자 외롭게 고생하며 살았지만 세상을 받아들이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이 시대의 화가는 위로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됩니다. 감동을 통해 세상을 포옹하고, 행복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의 작품에는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하나’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래서 자연을 변형시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일체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유자재의 경지에서 밝은 생명의 기운과 천진하고 소박한 미감을 빚어낸다.

“작품 구상을 따로 하지 않습니다. 그림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요. 감성에 깊이 빠져들며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리다 보면 그것이 곧 작품이 되는 거죠.”

유럽 화단에서 노씨의 이름 앞에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 ‘그림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이런 까닭이다. 최근 LA에서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부모님 생각에 펑펑 울었다는 그는 “아이처럼 자연을 배우고, 들여다보면 ‘행복’이란 꽃이 활짝 핀다”며 “철 따라 나오는 자연의 색깔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아침 이슬 같은 존재”라고 강조했다.

“집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집 뒤에는 산이 있는 전주에서 자랐습니다. 매일 물고기를 잡고 놀며 행복감을 느꼈지요. 때로는 밤에 냇가에 나가 손전등을 켜고 물고기들 자는 것도 보면서 마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지금 내 마음속에는 장난꾸러기 아이가 놀고 싶어 합니다. 그림을 통해 온몸의 세포가 활짝 웃는 희열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다음달엔 일본 교토에서 개인전을 연다. (02)2287-359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