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춘의 데스크 시각] '알래스카의 여름'은 가고 있는데…
정철길 SK이노베이션 사장이 재미있는 말을 했다. “지금 정유업계와 석유화학업계는 알래스카의 여름과 같다”는 게 그 말이다. 알래스카의 여름은 7~8월 잠깐이다. 날씨가 쾌청한 것 같지만 금세 혹독한 겨울이 온다. 정유 및 유화업계는 작년 대규모 적자를 냈다. 1분기 흑자로 돌아섰지만 ‘반짝 호전’일 뿐이란 게 정 사장의 분석이다. 그는 “지금이 사업 구조를 바꿀 마지막 골든 타임”이라고도 했다. 긴 겨울에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비단 정유·유화업계만이 아니다. 국내 제조업 모두가 해당한다.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된 12월 결산법인 501곳은 지난 1분기 중 28조2637억원의 영업이익과 20조9286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전년 동기에 비해 영업이익은 7.1%, 순이익은 3.8% 늘었다. 두 가지 이익이 동시에 늘어난 것은 5분기 만이다. 분명 좋은 일이다. 쨍하니 맑은 여름이다.

엔저 추세에 인건비만 오르고

하지만 한 꺼풀만 벗기고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상장사 501곳의 1분기 매출(432조8223억원)은 작년 동기보다 5.8% 줄었다. 삼성전자는 물론이거니와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 간판 기업들의 매출이 약속이나 한 듯 뒷걸음질했다.

매출이 준다는 건 기업들의 규모가 쪼그라들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익이 늘었다는 건 원가가 줄었거나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판매관리비를 줄였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현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원가나 판매관리비를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다. 얼마 안 가 매출과 이익이 함께 줄어드는 ‘긴 겨울’을 맞고 만다. 그 전에 매출을 늘리든가, 원가 및 판매관리비를 구조적으로 줄여 놓아야 한다.

불행히도 아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적인 요소는 별로다. 매출 감소의 한 원인이었던 원화의 상대적 강세는 해소될 기미가 없다. 최근 3년 동안 일본 엔화에 대해 60%나 절상된 원화다.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일본 상품과 경합하는 상품의 경쟁력이 그만큼 약화됐지만, ‘엔저(低)-원고(高)’의 틀은 깨질 것 같지 않다. ‘외교 실패’라는 지적까지 나오는데도 그렇다.

기업은 나몰라라인 국회와 정부

원가 및 판매관리비도 마찬가지다. 1분기 원가 절감 요인이었던 유가는 이미 상승세로 돌아섰다. 인건비 부담은 더 늘어날 일만 남았다. 통상임금으로 이미 기업들의 부담은 가중됐다. 내년부터 300인 이상 기업은 정년을 60세로 연장해야 한다. 근로시간도 단축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인건비 부담을 줄일 대안은 마련돼 있지 않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더 절망적이다. 국회부터가 그렇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하라니까 엉뚱하게 국회법을 개정해 논란을 자초한 국회다. 골목상권이 힘들다거나 중소기업이 어렵다는 얘기만 나오면 관련법을 바꿔 놓고 보는 무소불위의 국회다. 야당의 끼워넣기 요구에 질질 끌려가는 여당의 행태를 보면 법인세 인상 등을 또 다른 안건과 바꿔 버릴지도 모른다. 과정은 나 몰라라 했다가, 결과에만 논평을 일삼는 정부에도 당분간 기대할 것은 없어 보인다.

알래스카의 여름은 가고 있는데, 어디를 둘러봐도 우군은 없다. 결국 믿을 것은 기업 자신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하영춘 산업부장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