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개인정보 분쟁조정, 실효성을 높여야
최근 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회는 홈플러스 개인정보 불법 매매 피해자들이 제기한 집단분쟁 조정 신청에 대해 조정절차 불개시 결정을 내렸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기업을 감싸는 결정이라며 기업 쪽 일을 많이 하는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들을 위원으로 대거 위촉한 탓이라고 비난했다. 이는 사실무근일 뿐만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개인정보 분쟁조정제도 전반을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회는 피해자들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재판 대신 분쟁조정을 통해 신속·간편한 구제를 받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2001년 12월 발족했다. 2011년 새로 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통합 분쟁조정기관으로 재출범한 위원회는 학계, 법조계, 시민사회단체, 사업자단체 추천 위원 등 20명 이내 전문가로 구성돼 설립 이래 지금까지 4700건 이상의 조정 사건을 처리했다. 그중 절반이 넘는 2500여건에서 손해배상, 제도개선 권고, 조정 전 합의 등을 통해 피해를 구제하는 실적을 거뒀다. 조정 신청사건의 절반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구제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위원회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원회에서 제시한 조정안을 당사자 모두가 수락하지 않으면 조정이 성립할 수 없으며, 언제라도 조정을 거부할 수 있고 또 거부해도 아무런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없다는 현행 제도의 근본적 한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분쟁조정이 성공하려면 당사자, 특히 가해자인 피신청인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공기관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조정에 응해야 할 의무를 지지만 기업이나 민간단체 등은 조정신청이 들어와도 반드시 그에 응할 의무가 없다. 이 때문에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로 집단분쟁조정의 대상이 된 기업들이 이해득실을 따져 조정에 불응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피신청인이 조정에 불응하거나 자료제출을 거부하면 위원회가 강제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같은 사건에 관한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처음부터 조정에 불응할 경우 이를 무릅쓰고 조정을 진행할 수도 없고 또 충실한 사실조사가 불가능해 조정안을 제시하기도 어렵다. 설사 조정안을 제시하더라도 거부할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제한된 시간과 비용, 노력을 들여 일방적으로 조정을 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게다가 거론조차 민망한 수준의 예산과 영세하기 짝이 없는 조직·인력으론 위원회 독자적인 사실조사 기능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해킹 등으로 인한 개인정보 대량유출 사고는 피해자가 많고 배상액도 기하급수로 커져서 배상 결정이 나와도 피신청인이 조정안 수락을 거부할 개연성이 높다. 게다가 피해자 측에서 분쟁조정을 거치지 않고 법원에 바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사실상 분쟁조정을 무용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집단분쟁조정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최근 대기업 관련 집단분쟁조정을 둘러싸고 위원회의 소극성·친기업편파성 시비가 벌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동안 제도 운영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 해결이 시급함을 일깨워줬다는 점에서 ‘입에 쓴 양약’이라고 생각한다. 강제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정 불응의 사유를 공표토록 하는 방안, 또는 조정 참여여부와 상관없이 위원회에 조사권을 부여하고 자료제출 권한을 강화하거나 관련 기관에 사실조사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들을 적극 강구해 나갈 시점이다. 또 위원회의 분쟁조정 내용을 법원에 문서로 전달해 조정 거부자에 대한 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방안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홍준형 < 개인정보분쟁조정위 위원장 joonh@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