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갑(甲)은 갑갑하고 을(乙)은 우울하고…
계약 당사자를 지칭하는 ‘갑을(甲乙)’이 대립 코드로 둔갑했다. 통상 ‘갑’이 ‘을’보다 우월한 지위인 점을 부각시킨 ‘편 가르기’ 의도가 짙다. ‘갑질’이 악(惡)의 근원으로 몰린 가운데 여당 대표를 앉혀 놓고 전직 대통령 아들이 “힘 있고 돈 있는 집이 갑질하기 좋게 만든다”며 꾸짖었다.

계약서의 갑을은 한국 특유의 용어다. 매수인·매도인은 영문 계약서에서는 ‘바이어(buyer)-셀러(seller)’로 표시되는데 우리는 갑을로 축약한다. 납품 계약에서 매수인 갑은 대기업, 매도인 을은 중소기업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부동산 매매의 경우 매도인 갑이 관행이다. 갑을 자체가 중립적 개념이기 때문에 갑질이라는 용어는 생뚱맞다.

갑질 논란을 증폭시킨 도화선은 아이돌그룹 전속계약이었다. 노예계약이라며 청소년 팬이 봉기했다. 동반성장 화두와 함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납품 계약이 문제가 됐다. 그러다 계약과는 전혀 상관없는 해프닝이 대한항공 기내에서 연이어 돌출됐다. 포스코에너지 상무가 비즈니스석에서 라면을 제때 끓여오지 않는다고 타박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많은 대기업이 임원도 이코노미석을 타도록 지침을 바꿨다. 텅 빈 일등석에 홀로 앉은 사주(社主) 장녀인 부사장이 땅콩 서비스를 놓고 승무원과 충돌했다. 갑질이 ‘대기업 횡포’로 굳어졌다.

청년 구직자에게는 자신을 외면하는 대기업이 얄밉다. 이익을 쌓아두고 투자를 안 한다는 프로파간다가 먹혀든다. 청년 채용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기업주는 몰락한 STX의 강덕수 전 회장이다. 조선 경기의 급속한 냉각도 문제였지만 투자와 채용의 지나친 확대가 치명적 패착이다. 1심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 중이다. 채용해도 불경기가 덮치면 인력과 사업을 신속히 축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에서 해고는 거의 불가능하고 급여 삭감도 노동조합 동의를 얻어야 한다. 채용을 늘리기 전에 교도소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기업 경영 책임은 무섭다. 20년 전의 30대 기업집단 중 절반이 망했다. 망한 기업주는 어김없이 징역살이다. 기업에 대한 온갖 규제를 남발한 정치권력 책임은 깃털처럼 가볍다. 사실상 소급 규제도 남발한다. ‘정년연장법’에서는 기존 근로자도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도록 정했다. 기업이 끽소리 못하게 ‘사업주가 정년을 60세 미만으로 정해도 정년을 60세로 정한 것으로 본다’는 조항으로 대못을 박았다. 정년연장으로 신규 채용 여력이 소진되자 ‘고용절벽’이 온다며 정부가 임금피크제를 들고 난리다.

신규 채용 늘리는 법률은 대부분 헛방이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이 발효됐으나 약효가 없다. 민간 기업의 피라미드형 연령 구조에 비해 공공기관은 극심한 항아리형이다. 정상적 피라미드형에서 이탈 정도가 심하면 경영평가에서 대폭 감점해 성과급을 몰수해야 한다. 민간 기업 들볶기보다 공공기관의 청년 고용 불균형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필기와 면접시험에 불합격한 구직자에게 사유 통보를 의무화하는 의원입법도 등장했다. 삼성꿈장학재단이 사회복지전공 1인을 공채했는데 1030명이 지원했다. 서류심사에 참여한 임직원은 우수 인재풀을 놓고 매우 안타까웠다. 매년 340억원의 장학금을 저소득층 중고등학생에게 지급하는데 직원 1인이 추가되면 10명의 장학생을 탈락시켜야 한다. 주말을 반납하고 매달려 최우수 지원자를 뽑았다. 탈락 사유 소명이 법제화되면 공개 채용 업무는 훨씬 늘어난다. 이의제기와 소송으로 이어질 상황에서 ‘공개 채용 포기’가 속출할 것이 뻔하다.

정부가 제출한 청년일자리 법안을 국회가 깔아뭉갠다고 대통령이 한탄하지만 별로 감동을 못 얻는다. 약효가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정년연장법처럼 ‘기업이 채용하지 않아도 채용된 것으로 본다’는 화끈함도 없다. 법안을 자꾸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출자·채용·급여·구조조정에 대한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 온갖 규제로 탈진 상태인 기업을 풀어줘야 투자가 살고 일자리 찾는 청년이 우울함을 떨치고 비상할 길이 열린다.

이만우 < 고려대 교수·경영학 leemm@kore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