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감수성결핍증후군 앓는 정부
누구나 다 안다. 초기에 철저하게 막았더라면 이런 엄청난 재앙은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초기 대응’이라고도 하고 ‘초동 대처’라고도 한다. 이 정부가 특히 못하는 부분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정부가 무능해서일까. 아닌 게 아니라 정부가 무능하다는 얘기가 무성하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보다 괴담이 더 무섭다고 말하는 정부가 더 무섭다는 얘기가 천지에 도배되고 인구에 회자된다. 몰랐는데, 질서와 안전만은 잘 챙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박근혜 정부도 다를 게 없더라는 탄식이 나온다. 관료들이 무능과 무책임의 비난, 아니 비난 받을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어쩌면 숙명적이다. 하지만 과연 관료의 무능 탓일까. 관료 중 유능한 사람은 많지만 정부가 무능해서 문제라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관료와 정부는 결국 한 몸이 아닌가.

사망자와 3차 감염자가 나온 이후 메르스 관련 대책회의를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하는 동안 박 대통령은 전남 창조혁신센터 출범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르스로 생명을 위협받는 국민이 단 한 명일 뿐이라도 대통령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직접 챙기는 자세를 보였어야 했다. 창조혁신센터가 대통령이 직접 챙긴 역점 사업이라고 해도 변명이 될 수 없다. 부총리를 보낼 수는 없었을까. 부총리가 직무대행임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총리가 앞장선 것으로 알겠지 하고 여겼다면 큰 오산이다. 하물며 직무대행인 부총리가 “국가적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라”고 지시한들 영(令)이 섰을까. 국민이 선거를 통해 뽑은 대통령인데 이런 식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는 광경을 봐야 하는 국민이 딱할 뿐이다.

가장 안타깝고 분한 일은 초동 대처만 제대로 했더라면 이 무참한 결과를 겪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확진환자 다수가 두 병원을 매개로 감염됐는데도 정부는 병원 이름을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발병 초기에 감염 거점을 폐쇄하는 선제 대응을 했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결과가 됐다. 정부는 뒤늦게 ‘기존 매뉴얼에 따라 (격리 공간을) 조금 협소하게 짰던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했지만 이미 늦었다. 혹 정부의 안일한 초동 대처가 얼마간 난리법석을 떨어도 결국 몇 주만 잘 넘기면 ‘상황 끝’이라는 설익은 잔꾀 탓이 아니길 빈다.

초동 대처 실패는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졌다. 국민이 겪은 직·간접적인 피해와 손실도 문제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부에 대한 믿음이 땅 꺼지듯 추락했다는 것이다. 비상사태에서 정부가 초동 대처에 실패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센스와 감수성이 결핍돼 있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창조혁신을 아무리 해도 이렇게 뚫리면 소용이 있을까. 대통령을 위시해 정부와 관료 모두가 일종의 센스와 감수성결핍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각료들이 정책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대통령 눈치만 본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수석비서관 등 보좌진과 장관들이 진언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에서 상상력과 책임은 기대하기 어렵다.

제발 복기 좀 하자. 반성 좀 하자.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악몽 회피만이 능사가 아니다. 고통스럽더라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 뜯어 고쳐야 한다. 대통령과 보좌진, 각료들이 마주 앉아 과거 아니 현 정권 임기 동안이라도 초동 대처 실패사례들을 모아 원인과 해결책을 진단하고 고민하는 위기관리 영향 분석을 해야 한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유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불리한 일일수록 지도자의 책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두려울 게 무엇인가. 어렵사리 방미(訪美)를 연기한 것은 수긍할 만한 결단이지만 사태가 그만큼 심각해진 게 아니길 바란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무엇이라도 기억할 만한 혁신적 변화를 이뤄낸 대통령으로 기억되기 바란다.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장 joonh@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