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 결혼예물로 태그호이어 시계를 산 최모씨는 얼마 전 다시 매장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구입 당시 649만원이던 가격이 527만원으로 122만원이나 떨어진 것을 발견해서다. 태그호이어는 지난 3월 국내에서 판매하는 대부분 시계 가격을 내렸다. 최대 27%까지 값이 떨어졌다. 최씨는 “태그호이어는 6개월~1년마다 가격을 인상해온 브랜드”라며 “이렇게 크게 떨어질 줄 알았다면 구매시기를 늦췄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연례행사처럼 값을 올려온 해외 명품업체들이 가격을 줄줄이 끌어내리고 있다. 지난 3~4월 샤넬 태그호이어 파텍필립 고야드가 최대 30% 가까이 가격을 인하한 데 이어 최근에는 IWC, 예거르쿨트르, 파네라이, 바쉐론콘스탄틴, 피아제 등이 국내 판매가를 5~10% 내렸다.

아시아 고가전략, 더 이상 안 먹힌다

명품업체들이 이처럼 가격을 내리고 있는 것은 환율 변동이 컸기 때문이다. 올 들어 유로화가치가 20% 이상 급락해 국가 간 가격 차가 지나치게 벌어지자 글로벌 가격 체계를 전면 개편한 것이다. 한 명품업체 관계자는 “이번 가격 조정은 한국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본사 지침에 따라 아시아 가격은 인하하고 유럽 가격은 인상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명품은 보통 유럽보다 중국에서 30~40% 더 비쌌지만 올초에는 차이가 50~80%까지 벌어졌다. 아직 가격을 조정하지 않은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스피디 30 핸드백’은 중국 베이징 매장의 가격이 프랑스 파리 매장보다 65% 비싸다.

과거 명품업체들은 아시아시장에서 의도적으로 값을 높게 매겼다. 그래도 잘 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경 없는 쇼핑’이 대세가 되면서 이런 고가전략을 고수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유럽에서 정품을 산 뒤 자국에서 되파는 ‘명품 재테크’는 물론 전문 구매대행업체까지 성업 중이다. “프랑스에서 샤넬백을 하나 사서 인터넷으로 팔면 항공료값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본사 매장을 거치지 않는 병행수입시장도 명품업체 유통망을 흔드는 위협요인으로 떠올랐다. 국내 한 명품 수입업체 대표는 “100만원 이하 중가 제품은 병행수입 때문에 가격 체계가 사실상 붕괴됐다”며 “초고가 브랜드 판매를 강화해 활로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명품업체 입장에서는 일부 국가에서 가격을 다소 내리더라도 통제가 불가능한 ‘회색시장’을 차단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됐다. WSJ는 “1인당 구매량을 제한하고 보안요원까지 고용했지만 회색시장은 여전히 번성 중”이라고 전했다.

스위스 시계·보석도 수백만원 뚝

최근 가격을 내린 브랜드들은 수백만~수천만원대 고가 상품이 많아 인하 폭이 작게는 10만~20만원, 크게는 300만~400만원에 이른다. 피아제 ‘포제션 링’은 138만~693만원에서 127만~640만원으로 7~8% 떨어졌고 IWC ‘빅 파일럿 워치’는 1950만원에서 1790만원으로 8.2%(160만원), 예거르쿨트르 ‘랑데부 나이트 앤드 데이’ 핑크 골드 제품은 3070만원에서 2600만원으로 15.3%(470만원) 내려갔다.

명품업계 특성상 정가를 이처럼 큰 폭으로 떨어뜨리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중요시하는 ‘희소성’ 전략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제품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구매한 기존 충성고객의 반발을 감수해야 하고, 중고시장 시세도 동반 하락한다.

하지만 명품값이 내렸다는 소식에 소비자가 몰리면서 매장들은 ‘특수’를 누리고 있다. 올 3~5월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의 해외 명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4.3%, 23.4%, 5.2% 뛰어 전체 상품군의 평균 증가율을 앞질렀다. 한 명품업체의 한국 브랜드매니저는 “샤넬과 태그호이어가 가격을 인하한 뒤 국내 매출이 크게 뛰었다”며 “다른 업체들도 중장기적으로 매출에 도움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구찌와 버버리도 중국에서 가격을 인하함에 따라 한국 판매 가격이 내려갈지도 관심거리다.

■ 베블런 효과

Veblen effect. 가격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 상류층 소비자들의 사치재 구매 행태가 대표적 사례다.

■ 1물1가의 법칙

완전경쟁이 이뤄지면 동일한 상품은 어떤 시장에서든 가격이 같아야 한다는 이론. 현실에서는 운송비, 관세 등의 제약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