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PGA 투어 통산 8승을 거두고 2013년부터 대학 강단에 선 정일미 호서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아직도 교수보다 프로라는 호칭이 더 좋다”며 밝게 웃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KLPGA 투어 통산 8승을 거두고 2013년부터 대학 강단에 선 정일미 호서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아직도 교수보다 프로라는 호칭이 더 좋다”며 밝게 웃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스마일 퀸. 미국LPGA 투어에 진출한 한국선수 1세대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정일미(43)의 별명이다. 늘 잘 웃고, 아깝게 우승컵을 놓쳐도 환한 미소만은 잃지 않아 이런 애칭이 붙었다. 그런 정일미가 남학생까지 벌벌 떨게 하는 ‘호랑이 교수님’이 됐다. 2013년 1월부터 호서대 스포츠과학부 골프전공 교수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정일미 교수의 첫인상은 ‘스마일 퀸’답게 서글서글하고 발랄했다. “아직 교수보다 프로라는 호칭이 더 좋다”며 밝게 웃는 그는 여전히 10대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터프함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평소에는 따뜻하고 편안하지만 가르칠 때만큼은 180도 달라진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다.

“처음 학생을 가르칠 때 그립부터 점검하잖아요. 한 남학생에게 그립을 잡아보라고 했더니 손을 벌벌 떨더라고요. 안전을 위해 처음엔 엄격하게 교육하는 편인데, 제가 너무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는 마치 다른 사람 얘기를 하듯이 일화를 소개하며 밝게 웃었다. 정일미는 1995년 프로 데뷔 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통산 8승을 거두며 국내 여자골프계를 평정했다. 2004년에는 ‘늦깎이’로 미국 무대에 도전해 영광과 좌절을 맛봤다. 이후 대학 강단에 서기까지 자신의 ‘골프 인생’을 진솔하게 털어놨다.

“기술은 10~20%밖에 안돼”

[人사이드 人터뷰] 정일미 교수 "골프는 정신스포츠…독서로 내면 채워야"
골프 교습이 전문화하고 있지만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낸 유명 프로골퍼가 대학 강단에 선 사례는 아직 많지 않다. 정 교수의 수업은 어떻게 이뤄질까. 그는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골프와 관련된 기본 에티켓과 소양을 학생들이 갖추도록 사소한 것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 예를 들어 쇼트게임을 연습할 때는 그린을 보수하는 피치마크 수리기를 꼭 챙기게 한다. 이를 지키지 않은 학생은 PT(체력단련)체조 100번을 각오해야 한다.

“기본 소양이 돼야 어디를 가도 좋은 골퍼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스폰서는 물론 캐디, 코치, 팬, 동반자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프로골퍼라고 할 수 있겠죠.”

학생들이 그의 수업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독서(讀書) 과제다. 이 과제도 기본 소양을 닦기 위한 것이다. 보고서는 반드시 자필로 써야 한다. 인터넷에서 마우스로 긁어다 붙여넣는 ‘베끼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골프를 잘하려면 신체적 발달과 지적 발달이 함께 이뤄져야 해요. 요즘 어린 선수들을 보면 기술적인 면에만 집착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좋은 코치를 만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골프는 정신적 소모가 굉장히 큰 스포츠예요. 필드에 나가면 공간지각력, 순간판단력, 리듬감 등을 종합적으로 갖춰야 합니다. 기술은 10~20%밖에 안 된다고 봐요.”

그 다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노력이다. 연습장 박스에서 10분도 채우지 못하고 나오는 학생이 있고, 스스로 몰입해 연습할 거리를 만들어 하는 학생도 있다. 안타까운 점은 타고난 감각을 가진 학생은 전자의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프로생활을 하다 보면 결국 기술은 비슷해진다”며 “얼마나 끈기를 갖고 노력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고 강조했다.

수업은 엄격하지만 학생들이 직접 배점하는 그의 교수 평가 점수는 90점이 넘는다. 엄격하지만 사소한 상담에도 열정을 쏟는 정성과 배려를 학생들도 느끼기 때문이다.

15년 한결같았던 오전 5시 기상

[人사이드 人터뷰] 정일미 교수 "골프는 정신스포츠…독서로 내면 채워야"
정 교수는 현역 시절 철저한 자기 관리로 유명했다. 프로 데뷔 때부터 정규 투어 생활을 그만둘 때까지 15년 넘게 오전 5시에 일어나 10시까지 다섯 시간씩 연습하는 생활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는 “‘5시에 일어나는 이 생활을 그만둘 때 투어를 그만둔다’고 마음먹었다”며 “골프에 재미를 잃을까봐 TV도 예능 프로그램은 보지 않고 뉴스와 다큐멘터리처럼 딱딱한 것만 봤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5분 동안 거울 앞에서 미소 짓는 법도 연습했다고 한다. 시합 때는 머리핀 하나가 마음에 안 들면 옷을 전부 다 갈아입었다. 그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그렇게 연습하고 나가면 시합 때 ‘나보다 많이 연습한 애는 없어’라는 마음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승부욕도 강해서 완벽주의자 같은 모습이 있었죠. 투어를 그만뒀을 때도 여섯 달 동안은 새벽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버릇이 꽤 오래갔죠.”

정 교수의 멘토는 아버지다. 프로 시절 그의 아버지는 “운동선수라고 무식해선 안 된다”며 신문 사설을 오려서 보내줬다. 한창 골프 실력이 만개하던 스무 살 때 이화여대 체육학과 90학번으로 입학해 학업에 열중한 것도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라이벌 선수들은 아시안게임에서 메달도 따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데, 저는 학업을 병행하느라 아등바등 살았어요. 그 시절엔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왜 그토록 교육을 강조하셨는지 알겠더라고요.”

그의 아버지는 골프 마니아지만 한 번도 딸의 시합을 보러 오지 않았다. ‘딸의 우승을 위해 다른 아이들이 못하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수들의 투어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챙기는 요즘 ‘골프 대디’들과는 딴판이다. 정일미가 미국 무대에서 좌절을 맛보고 돌아오자 위로는커녕 “이제 니 혼자 잘난 게 아닌 걸 알겠제?”라며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골프는 외로운 운동

정 교수는 다른 선수들이 은퇴할 나이인 33세에 미국 무대에 도전했다. 그 자체가 아름다운 도전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자존심 센 그는 우승을 못하자 힘들어했다. 하루 아침에 최고의 자리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먹는 것도 힘들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골프를 했어요. 속상해서 울 때도 많았죠. 그때 많이 읽었던 책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예요. 미국에서 실패를 맛보지 않았다면 전 지금까지도 기고만장한 공주였을 거예요. ‘열심히 해도 안 될 수 있구나, 우승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조금은 자신을 용서할 줄도 알게 됐어요. 사람다워졌죠.”

최근 후배들이 LPGA 투어에서 맹활약하는 것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고 했다. 그는 “골프는 팀이 아니라 혼자 하는 운동이어서 후배들이 타지에서 많이 외롭고 힘들 것”이라며 “외롭더라도 잘 극복하고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앞으로 골프 꿈나무들이 골프와 더 친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처음부터 부모의 권유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골프를 시작하다 보니 금세 흥미를 잃는 선수가 많은 게 안타까워서다.

“후배들이 골프를 정말 좋아서, 즐거워서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골프를 통해 친구를 만나고 인생을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려면 저도 더 많이 공부해야겠죠.”

“학생들 위해 KLPGA 1부 투어 출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레전드’ 정일미 교수는 여전히 현역이다. 그는 지난 4월 볼빅 시니어투어 1차전에서 우승했다. 작년 시니어 투어 데뷔전 우승을 포함해 통산 2승째.

최근에는 허리 부상으로 주춤했지만 올해나 내년에 KLPGA 1부 투어에 출전할 계획도 갖고 있다. KLPGA 투어 통산 8승을 거둔 정일미는 우승자 자격으로 1부 투어에 나갈 수 있다. 자신이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서다.

“자존심 때문에 못 나가고 있었는데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나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캐디백을 메겠다고 하는데 그런 것도 큰 경험이죠. 요즘 KLPGA 투어는 어떤지 직접 느껴보고 학생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고요. 더 나이 먹기 전에 나가 봐야죠. 90개 치는 걸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호호.”

정 교수는 이번 대회 우승 때 ‘해피 퍼터’라는 신병기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퍼트가 잘돼서 우승까지 할 수 있었다”며 “해피 퍼터는 로프트나 라이 각도에 맞춰서 조정할 수 있어 편하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불혹 이후 골프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고 했다. “예전에는 투어에서 우승하면 ‘내가 잘해서 이긴 것’이란 마음이 우선이었는데 이젠 주변에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더라고요. 지난 4월 대회 때도 예전에 투어 생활을 함께한 선후배와 같은 조에서 경기를 했는데, 옆에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고 다독여줘서 마음 편히 경기한 게 우승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아직도 감사할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게 소중하고 고마운 일인 것 같습니다.”

골프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골프를 30년 했지만 잘 모르겠다”며 “어렵지만 아직도 그것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점이 골프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