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이영학 씨가 현대화랑의 개인전에 출품한 ‘물확’ 앞에 앉아 있다.
조각가 이영학 씨가 현대화랑의 개인전에 출품한 ‘물확’ 앞에 앉아 있다.
정원이나 아파트 베란다, 거실 한쪽에서 볼 수 있는 물확(돌에 홈을 파서 물을 담아두는 것)이 전시장에 널려 있다. 화강암의 질박한 모양을 그대로 살려둔 채 가운데를 기역자나 사각형, 원형 등으로 움푹하게 파낸 뒤 물을 담고 이끼나 풀을 덮었다. 가끔 물을 뿌려주면 돌 표면은 특유의 생명력으로 숨 쉬고 이끼의 푸른 빛은 더욱 짙어진다. 조각가 이영학 씨(66·사진)의 ‘물확’ 작품을 본 관람객들이 ‘탐난다’는 말을 연발하는 이유다.

물확과 새 조각으로 유명한 이씨가 다음달 5일까지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이씨는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로마 아카데미아와 로마시립장식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국전 특선만 여섯 차례 차지했다. 8년 만에 열린 이번 개인전에는 오래된 화강암을 활용해 만든 ‘물확’ 시리즈 35점과 새 조각 100점을 내놓았다.

이씨는 “화강암을 쪼아 물확을 만들고 이끼를 키우는 데 10년이 걸렸다”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이 작품을 통해 잠시나마 삶과 자연을 관조하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씨가 새롭게 선보인 물확은 한옥의 댓돌이나 절 마당에 놓인 물확만큼이나 담박한 멋을 풍긴다. 농축한 손맛이 배어 있어 무기교의 기교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 절간에 놓여 있는 물확을 우연히 보고 큰 영감을 얻었다. 물과 돌, 풀이 조화를 이룬 물확에서 미학적 에너지의 충격을 받고 나니 삶과 자연, 상처와 치유, 음과 양의 이치를 거짓말처럼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물확을 통해 ‘나와 자연’ ‘나와 우주’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제게 물확은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명상의 세계입니다. 일과를 잠시 멈추고 물확에 시선을 주면 마음이 절로 조용해지거든요. 누구나 멈춰 있는 물을 보면 힐링이 되잖아요. 물확은 정신적 풍요와 근원의 영역에 다가서는 계단 같은 존재입니다.”

이씨의 물확은 많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구구한 서술도 없다. 지극히 시적이며 은유적이다. 우주와 자연을, 삶의 풍요와 명상의 세계를 명징하게 보여줄 뿐이다. 이씨는 “현대미술도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한다)’의 정신을 담아낼 때 진정한 예술이 된다”고 강조했다.

오래된 화강석을 부분적으로 자르거나 파내어 만드는 물확이 그렇듯 그는 녹슨 농기구 쇠붙이로 새를 만드는 작업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창고나 부엌에 있던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새는 고유하고 단순한 조형미를 뽐낸다. 돌쩌귀로 만든 부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거나, 춤을 추듯 몸이 유연한 새의 모습 등 자세도 제각각이다. 버려진 재료에 그의 손이 닿자 생명이 되살아난 셈이다. 농기구의 변신에 해학과 재치가 넘친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