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TPP 참여, 한·중·일 경제통합 기회로 삼아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드디어 결승선을 끊을 듯하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달 말 무역협상촉진권한(TPA)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TPP 타결 후에도 미국 의회의 비준 과정은 대격돌을 예고하고 있지만, 미국이 21세기 초반 국제통상 규범 제정 경쟁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확실하다. TPP의 진전은 아직 협상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한국과 중국에 새로운 전략적 공간을 제공한다. 미국 일본 캐나다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12개국이 참여하고 세계경제의 40%, 세계무역의 25%가 넘는 비중의 TPP를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TPP의 중요성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TPP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본이 협상에 참여한 2013년 봄 이후다. 오랜 세월에 걸친 농업 보호주의 정책으로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 버티고 있는 일본은 그동안 세계 각국의 경쟁적인 FTA 물결에서 벗어나 있었다.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이 미국 및 유럽연합(EU)과 FTA를 체결하는 것을 일본은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능동적이고 선제적인 통상정책으로 경제영토를 넓혀가는 한국을 보며 일본은 왜 한국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스스로 책망했다.
[뉴스의 맥] TPP 참여, 한·중·일 경제통합 기회로 삼아야
그런 일본은 더 이상 없다. TPP 참여를 좌고우면(左顧右眄)하던 일본은 2013년 초, 아베·오바마 정상회담을 통해 TPP 협상 참여를 전격 선언했다. TPP 참여는 지금까지 어떤 협상으로도 그 단단한 빗장을 열 수 없었던 일본 농업시장을 개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4월 말, 일본 총리로는 처음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한 아베 총리는 그 연설의 상당 부분을 일본 농업시장 개방에 할애했다. 일본의 농업 개방 없이 TPP가 타결될 리 없음을 아는 아베 총리는 농업 개방으로 일본 경제 개혁, TPP 타결, 미·일 동맹 공고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속셈이다. 일본과의 FTA 레이스에서 저만치 앞서 뛰던 한국에 일본의 TPP 참여는 한순간에 상황을 반전시키는 절묘한 ‘신의 한 수’다. 일본은 TPP 참여 여세를 몰아 EU와의 FTA 협상도 추진하고 있다.

FTA 열세 뒤집은 일본

한국은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 TPP에 대한 공식적인 관심 표명 이후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TPP를 바라보는 시각은 느긋하다 못해 여유롭기까지 하다. TPP 참여국 대부분과 FTA를 체결했고, 아직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는 일본 멕시코 정도인데, TPP 가입을 위해 한·일 FTA를 과연 추진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이나 비관론이 정부 당국자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2004년 11월, 협상을 중단한 한·일 FTA 좌초의 결정적인 이유는 농업시장 개방에 대한 일본의 미적지근함이었다. 한국만으로는 열 수 없었던 일본 농업시장 개방이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서는 가능하다는 사실은 한국이 TPP의 틀 속에서 한·일 FTA를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추동력을 준다.

두려워할 이유 없는 한·일 FTA

일본자동차가 몰려오기 때문에 한·일 FTA를 반대한다는 것이 국내 자동차업계의 반대논리가 될 수는 있지만, 그간 한국 자동차산업 성장 과정에서 ‘국내 소비자만 봉’이었다는 불만을 느끼고 소통할 줄 아는 정부 당국자라면 그 보호 논리에 기대는 것은 국익을 앞세우는 공인의 자세가 아니다. 한국 자동차시장은 이미 국산차와 외국산차 간에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들 차의 국내 가격에 낀 거품을 걷어내려면 더 강력한 경쟁이 필요하다. 소비자의 실질소득을 증대하는 정책이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한 한국 경제에 필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최악의 관계로 치닫는 한·일 관계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으려면 TPP에 참여하면서 한·일 FTA를 추진하는 것이 한국이 둘 수 있는 ‘신의 한 수’다. 한·일 FTA를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한국 정부가 전략적으로 TPP에 접근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중국 때문이다. 중국을 주요 2국(G2)으로까지 끌어올린 성장모델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중국 경제는 과열됐고 포화 상태다. 시진핑 정부는 신창타이(新常態·뉴노멀)라고 부르는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으로의 변환을 시작했다. 단순 조립 위주에서 고부가가치로,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발전으로, 핵심기술 자립도 증가, 환경 친화적 발전으로의 변환을 모색하고 있다. G1으로 등극할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아닌 ‘세계의 시장’을 꿈꾸고 있다.

중국이 가려는 새 길을 열기 위해서 새로운 개방과 경쟁, 개혁이 필요함을 중국 정부는 잘 알고 있다. 서비스 개방의 실험무대로 상하이 자유무역지대를 열었고, 추가로 3곳을 더 지정했다. TPP 초기, 중국은 TPP를 중국을 견제하려는 술책이라고 공개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지만 TPP에 중국도 가입할 수 있다는 신축적, 전향적인 자세로 선회했다. 중국이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인도가 참여하는 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추진하고 있지만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고, TPP의 대안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TPP가 타결된다면 중국은 TPP 가입 협상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中 시장 개방 확대에도 필요

15년 걸린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에 비견할 정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은 서비스시장 개방을 추진할 것이고, 한·중 FTA만으로는 개방하기에 부족한 중국 서비스시장을 더 크게 개방할 것은 분명하다. 세계 8대 통상대국인 한·중·일 3국 간에 제도화된 경제통합의 틀이 없다는 것은 21세기 동아시아가 공존과 평화의 기틀 위에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는 기반이 취약함을 의미한다. 한·중·일 FTA가 진행 중이지만, 높은 수준의 포괄적인 경제통합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TPP는 제대로 된 한·중·일 경제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을 제공한다. 그 기회를 한국은 놓치지 않아야 한다.

최병일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