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두 심장' 산티아고 순례길과…천년고도(古都) 톨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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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걸으며 지친 마음 치유하고 …옛 시가지엔 가톨릭 숨결과 중세의 분위기가…
스페인의 모든 도시는 ‘성지(聖地)’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800㎞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유럽인 사이에서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버킷 리스트’로 꼽힌다.
천년 고도(古都) 톨레도는 스페인 가톨릭 역사를 압축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중세 성채도시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1000년 가까이 이 지역을 지배한 왕국들의 수도였다. 스페인 성지 순례를 간다면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되는 스페인의 두 ‘심장’을 소개한다. ‘난 누구인가’ 깨닫는 치유의 여정 800㎞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때문이건, 이 길 위에서 막연한 희망을 마주했다는 주변인의 이야기 때문이건 길을 떠난 이유는 상관없었다. 성 야고보의 여정을 좇아 가톨릭 신자들만 걷는 ‘영성의 길’이라는 생각은 반만 맞았다. 걷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고, 그렇게 30일을 걷다 보면 희미하게나마 존재의 이유를 만나게 되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100~800㎞의 다양한 순례길이 있지만, 대표적인 코스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대에 있는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해 팜플로나, 부르고스, 레온을 거쳐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의 ‘프랑스 루트’다.
족히 10㎏은 넘어 보이는 배낭에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데기와 조롱박을 매단 순례객 사이에서 함께 길을 걸었다.
시원한 바다와 아기자기한 길이 펼쳐지는 제주 올레길을 떠올렸다면 실망하기 쉽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과 드넓은 들판을 반복해서 걷는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와인 산지 리오하에선 푸른 포도밭에 취한다. 유서 깊은 도시 메세타에서는 오래된 돌길과 금빛 밀밭을 만난다. 순례길 곳곳에서 옛 성당과 마녀사냥의 화형대, 십자군 전쟁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노란 조개껍데기가 그려진 팻말이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중간중간 닭이 우는 작은 마을을 지나고,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을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했다. 소똥 냄새가 진동하는 들판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이 길을 걷었을까. 처음엔 야고보 성인의 영성을 좇기 위해 시작됐다. 스페인 서쪽 끝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도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끝 산티아고는 당시 로마를 기준으로 ‘땅끝’이었다. 성 야고보는 ‘땅끝’까지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의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다. 이후 제자들이 유해를 스페인으로 옮겼는데, 이슬람의 공격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시간이 흘러 9세기 초 스페인 서북부 지역에서 별빛이 나타나 숲속의 동굴로 사람들을 이끌었고, 이곳에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별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콤포스텔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의 무덤 위에 대성당이 세워지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교황 레오 3세가 이곳을 성지로 지정하면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유럽 3대 순례지가 됐다.
1982년과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한 데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1986년 이곳을 순례한 뒤 쓴 순례자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순례객이 더 늘어났다. 최근에는 순례증서를 받는 사람이 연평균 20명에 달한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인 순례자의 비중이 가장 높다.
과거에는 야고보 성인의 영성을 좇아 순례길에 오른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제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 대성당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를 위해 7개 언어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단순한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 오전 6시께 출발해 대자연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에 맞춰 20~30㎞를 걷고, 순례자 전용 숙소 알베르게(albergue)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빨래를 한 뒤 낯선 이들과 함께 잠을 청한다. 순례자 전용 여권이 있으면 이용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와 사설 알베르게는 대부분 5~10유로 선으로 착한 가격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순례객들은 식료품점에서 간단한 재료를 사 알베르게에서 함께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힘든 여정에서 말동무가 되기도 한다. 산티아고를 20㎞ 남겨둔 지점에서 만난 이윤정 씨(41)는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5일째 발이 물집투성이가 돼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만난 한 순례객이 실과 바늘을 소독해 제 물집을 치료해줬어요.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이들로부터 몸도 마음도 치유받아 결국 여기까지 온 거죠.”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발은 물집투성이지만 얻는 것은 많다. 이씨는 “마을마다 소똥 냄새가 나는 자연 속을 걸으면서, 인심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치유를 얻고 간다”고 말했다. 그가 이야기한 치유는 어떤 것이었을까. “고통은 결국 내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었어요. 길을 걸으며 생각해 보니 지나간 고통은 별것 아니었고, 마음도 더 단련됐죠. 다시 일상 순례길로 돌아갈 어떤 결의가 생겼어요.”
그리고 도착한 고딕 양식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주교좌대성당.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자 800㎞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의 종착지다. 배낭에 조개껍데기와 조롱박을 매단 이들이 상기된 얼굴로 순례자 증서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서 있었다. 한 50대 남성이 크레덴시알(순례자 전용 여권)을 자랑스럽게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들의 일정은 주교좌대성당 안에 있는 성 야고보의 유해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끝난다. 한 50대 남성은 땀에 전 티셔츠를 입고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무사히 순례 여정을 마친 데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을 만난 데 대해 감사 기도를 드린 것이리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스도교가 공존하는 천년 古都 톨레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2㎞ 지점에 있는 톨레도. 오래된 황토색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붙어 있는 이 소도시는 1000년 가까이 여러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배우 이보영 지성 커플이 이곳에 와서 웨딩화보 촬영을 한 이후 한국인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스페인의 대표 화가 엘 그레코(1541~1614)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그의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타호강에 둘러싸인 이 도시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성처럼 보였다. 사방이 강으로 둘러싸여 천연 요새로 불린 도시다. 라틴어 톨레툼(안전지대)에서 유래해 ‘톨레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세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황토색 집들과 이슬람풍의 기하학적 문양을 간직한 내부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톨레도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가 공존한 스페인 가톨릭의 독특한 성격을 간직하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서고트, 이슬람 정복시대와 가톨릭 군주시대를 거치면서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가 혼재된 문화양식을 남겼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혼재하는 과정에서 모자라베, 무데하르 등의 예술사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톨레도 옛 시가지에 들어서면 1000년 전통과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3세기부터 요새가 있었던 자리에 개축한 장방형의 요새 알카사르(Alcazar)와 산토 토메 성당, 엘 그레코의 집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그중에서도 가톨릭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대성당이다.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대성전은 프랑스 고딕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26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493년 완공됐다. 중앙 예배당에 서면 예수의 생애를 조각한 7폭의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이 병풍을 밝히고 있는 채광창 ‘엘 트란스파란테(El Transparente)’로 들어온 빛이 조각상에 부딪치며 반짝였다. 채광창은 마치 성인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천국의 문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성당에는 백성모마리아상이 미소를 짓고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13세기 초 프랑스에서 기증받은 이 성모마리아상은 톨레도 대성당의 보물이다. 주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성모마리아와 달리 이렇게 온화한 미소를 짓는 성모상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톨레도 대성당을 빠져나오니 좁은 거리의 하늘마다 주황빛 천들이 넘실거린다. 집집마다 다르게 장식한 알록달록한 태피스트리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걸어 10분쯤 가면 산토 토메 성당에 도착한다. 작고 아늑한 이 성당은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으로 유명하다.
이 걸작은 4.8×3.6m 크기와 분위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교회의 후원자였던 돈 곤살로 루이스 오르가스 백작을 매장할 때 스테파노와 아우구스티노 두 성인이 나타나 백작의 시신을 입관했다는 기적의 장면을 묘사한 명화다. 명화를 보기 위해 이 성당을 방문하는 관람객이 1년에 1만명. 1인당 2.5유로의 입장료로 계산하면 연 평균 2만5000유로다. “그가 죽은 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톨레도 시민들은 오르가스 백작의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라는 가이드의 말이 그럴싸했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뒤로 한 채 톨레도 유대인 지구로 향했다. 화려하고 정교한 회랑이 있는 산 후안 데 로스 레예스 성당이 있는 곳이다. 2층 회랑에는 격자무늬 천장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건축양식이 혼합된 무데하르 양식으로 꾸며진 천장이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외벽을 가득 채운 쇠사슬이 눈에 들어왔다. 이슬람 지배 시절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받은 치욕을 잊지 말자며 걸어 놓은 옛 지하 감옥의 쇠사슬을 성당 외벽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 톨레도가 품은 1000년의 가톨릭 역사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거대한 성채 도시인 톨레도를 한눈에 감상하기 위해 톨레도 옛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 밖에 있는 파라도르 데 톨레도(Parador de Toledo)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 오르니 타호강에 둘러싸인 톨레도와 지금까지 거닐었던 대성당, 마을 골목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가 서로 반목하고 또 공존하면서 압축해 놓은 역사의 산물들이 2000년의 역사를 넘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톨레도(스페인)=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천년 고도(古都) 톨레도는 스페인 가톨릭 역사를 압축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중세 성채도시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1000년 가까이 이 지역을 지배한 왕국들의 수도였다. 스페인 성지 순례를 간다면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되는 스페인의 두 ‘심장’을 소개한다. ‘난 누구인가’ 깨닫는 치유의 여정 800㎞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때문이건, 이 길 위에서 막연한 희망을 마주했다는 주변인의 이야기 때문이건 길을 떠난 이유는 상관없었다. 성 야고보의 여정을 좇아 가톨릭 신자들만 걷는 ‘영성의 길’이라는 생각은 반만 맞았다. 걷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고, 그렇게 30일을 걷다 보면 희미하게나마 존재의 이유를 만나게 되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100~800㎞의 다양한 순례길이 있지만, 대표적인 코스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대에 있는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해 팜플로나, 부르고스, 레온을 거쳐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의 ‘프랑스 루트’다.
족히 10㎏은 넘어 보이는 배낭에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데기와 조롱박을 매단 순례객 사이에서 함께 길을 걸었다.
시원한 바다와 아기자기한 길이 펼쳐지는 제주 올레길을 떠올렸다면 실망하기 쉽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과 드넓은 들판을 반복해서 걷는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와인 산지 리오하에선 푸른 포도밭에 취한다. 유서 깊은 도시 메세타에서는 오래된 돌길과 금빛 밀밭을 만난다. 순례길 곳곳에서 옛 성당과 마녀사냥의 화형대, 십자군 전쟁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노란 조개껍데기가 그려진 팻말이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중간중간 닭이 우는 작은 마을을 지나고,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을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했다. 소똥 냄새가 진동하는 들판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이 길을 걷었을까. 처음엔 야고보 성인의 영성을 좇기 위해 시작됐다. 스페인 서쪽 끝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도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끝 산티아고는 당시 로마를 기준으로 ‘땅끝’이었다. 성 야고보는 ‘땅끝’까지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의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다. 이후 제자들이 유해를 스페인으로 옮겼는데, 이슬람의 공격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시간이 흘러 9세기 초 스페인 서북부 지역에서 별빛이 나타나 숲속의 동굴로 사람들을 이끌었고, 이곳에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별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콤포스텔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의 무덤 위에 대성당이 세워지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교황 레오 3세가 이곳을 성지로 지정하면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유럽 3대 순례지가 됐다.
1982년과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한 데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1986년 이곳을 순례한 뒤 쓴 순례자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순례객이 더 늘어났다. 최근에는 순례증서를 받는 사람이 연평균 20명에 달한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인 순례자의 비중이 가장 높다.
과거에는 야고보 성인의 영성을 좇아 순례길에 오른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제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 대성당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를 위해 7개 언어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단순한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 오전 6시께 출발해 대자연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에 맞춰 20~30㎞를 걷고, 순례자 전용 숙소 알베르게(albergue)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빨래를 한 뒤 낯선 이들과 함께 잠을 청한다. 순례자 전용 여권이 있으면 이용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와 사설 알베르게는 대부분 5~10유로 선으로 착한 가격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순례객들은 식료품점에서 간단한 재료를 사 알베르게에서 함께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힘든 여정에서 말동무가 되기도 한다. 산티아고를 20㎞ 남겨둔 지점에서 만난 이윤정 씨(41)는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5일째 발이 물집투성이가 돼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만난 한 순례객이 실과 바늘을 소독해 제 물집을 치료해줬어요.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이들로부터 몸도 마음도 치유받아 결국 여기까지 온 거죠.”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발은 물집투성이지만 얻는 것은 많다. 이씨는 “마을마다 소똥 냄새가 나는 자연 속을 걸으면서, 인심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치유를 얻고 간다”고 말했다. 그가 이야기한 치유는 어떤 것이었을까. “고통은 결국 내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었어요. 길을 걸으며 생각해 보니 지나간 고통은 별것 아니었고, 마음도 더 단련됐죠. 다시 일상 순례길로 돌아갈 어떤 결의가 생겼어요.”
그리고 도착한 고딕 양식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주교좌대성당.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자 800㎞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의 종착지다. 배낭에 조개껍데기와 조롱박을 매단 이들이 상기된 얼굴로 순례자 증서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서 있었다. 한 50대 남성이 크레덴시알(순례자 전용 여권)을 자랑스럽게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들의 일정은 주교좌대성당 안에 있는 성 야고보의 유해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끝난다. 한 50대 남성은 땀에 전 티셔츠를 입고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무사히 순례 여정을 마친 데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을 만난 데 대해 감사 기도를 드린 것이리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스도교가 공존하는 천년 古都 톨레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2㎞ 지점에 있는 톨레도. 오래된 황토색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붙어 있는 이 소도시는 1000년 가까이 여러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배우 이보영 지성 커플이 이곳에 와서 웨딩화보 촬영을 한 이후 한국인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스페인의 대표 화가 엘 그레코(1541~1614)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그의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타호강에 둘러싸인 이 도시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성처럼 보였다. 사방이 강으로 둘러싸여 천연 요새로 불린 도시다. 라틴어 톨레툼(안전지대)에서 유래해 ‘톨레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세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황토색 집들과 이슬람풍의 기하학적 문양을 간직한 내부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톨레도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가 공존한 스페인 가톨릭의 독특한 성격을 간직하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서고트, 이슬람 정복시대와 가톨릭 군주시대를 거치면서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가 혼재된 문화양식을 남겼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혼재하는 과정에서 모자라베, 무데하르 등의 예술사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톨레도 옛 시가지에 들어서면 1000년 전통과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3세기부터 요새가 있었던 자리에 개축한 장방형의 요새 알카사르(Alcazar)와 산토 토메 성당, 엘 그레코의 집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그중에서도 가톨릭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대성당이다.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대성전은 프랑스 고딕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26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493년 완공됐다. 중앙 예배당에 서면 예수의 생애를 조각한 7폭의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이 병풍을 밝히고 있는 채광창 ‘엘 트란스파란테(El Transparente)’로 들어온 빛이 조각상에 부딪치며 반짝였다. 채광창은 마치 성인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천국의 문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성당에는 백성모마리아상이 미소를 짓고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13세기 초 프랑스에서 기증받은 이 성모마리아상은 톨레도 대성당의 보물이다. 주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성모마리아와 달리 이렇게 온화한 미소를 짓는 성모상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톨레도 대성당을 빠져나오니 좁은 거리의 하늘마다 주황빛 천들이 넘실거린다. 집집마다 다르게 장식한 알록달록한 태피스트리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걸어 10분쯤 가면 산토 토메 성당에 도착한다. 작고 아늑한 이 성당은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으로 유명하다.
이 걸작은 4.8×3.6m 크기와 분위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교회의 후원자였던 돈 곤살로 루이스 오르가스 백작을 매장할 때 스테파노와 아우구스티노 두 성인이 나타나 백작의 시신을 입관했다는 기적의 장면을 묘사한 명화다. 명화를 보기 위해 이 성당을 방문하는 관람객이 1년에 1만명. 1인당 2.5유로의 입장료로 계산하면 연 평균 2만5000유로다. “그가 죽은 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톨레도 시민들은 오르가스 백작의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라는 가이드의 말이 그럴싸했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뒤로 한 채 톨레도 유대인 지구로 향했다. 화려하고 정교한 회랑이 있는 산 후안 데 로스 레예스 성당이 있는 곳이다. 2층 회랑에는 격자무늬 천장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건축양식이 혼합된 무데하르 양식으로 꾸며진 천장이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외벽을 가득 채운 쇠사슬이 눈에 들어왔다. 이슬람 지배 시절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받은 치욕을 잊지 말자며 걸어 놓은 옛 지하 감옥의 쇠사슬을 성당 외벽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 톨레도가 품은 1000년의 가톨릭 역사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거대한 성채 도시인 톨레도를 한눈에 감상하기 위해 톨레도 옛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 밖에 있는 파라도르 데 톨레도(Parador de Toledo)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 오르니 타호강에 둘러싸인 톨레도와 지금까지 거닐었던 대성당, 마을 골목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가 서로 반목하고 또 공존하면서 압축해 놓은 역사의 산물들이 2000년의 역사를 넘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톨레도(스페인)=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