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숭동 수현재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스피킹 인 텅스’에서 쏘냐(전익령)와 레온(강필석) 부부, 제인(김지현)과 피트(김종구) 부부가 
한 무대에서 입맞춤하고 있다. 수현재컴퍼니 제공
서울 동숭동 수현재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스피킹 인 텅스’에서 쏘냐(전익령)와 레온(강필석) 부부, 제인(김지현)과 피트(김종구) 부부가 한 무대에서 입맞춤하고 있다. 수현재컴퍼니 제공
지난 11일 호주 극작가 앤드루 보벨의 대표작 ‘스피킹 인 텅스’를 상연 중인 서울 동숭동 수현재씨어터. 개막한 지 두 달여가 지났고, 연극이 다소 난해하다는 평가에도 250여석의 객석은 가득 찼다. ‘방언’이란 뜻의 이 작품은 서로의 남편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두 쌍의 부부가 각각의 불륜 상대와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다른 불륜 커플에는 전달되지 않는 설정으로 진행된다. 한 무대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이 중첩되는 기법에 연극적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내용이 헛갈릴 수도 있는 구조다. 원작자인 보벨도 “극이 구조적으로 복잡해 관객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고 말할 정도다. 연극이 끝나자 관객은 결말과 줄거리에 대한 해석을 이어갔다. 공연을 두 번째 보러 왔다는 한 30대 관객은 “처음 봤을 때는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아 친구와 함께 다시 왔다”며 “조각 맞추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감각과 구성으로 무장한 현대 영미극의 흥행 돌풍이 거세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도 관객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스피킹 인 텅스는 지난달 24일 관객 1만명을 돌파하는 등 흥행몰이를 하고 있고, 지난 5일 막을 내린 영국 극작가 브리오니 래버리의 ‘프로즌’은 전회(32회) 매진을 기록한 여세를 몰아 10일부터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연장 공연에 들어갔다. 14일 서울 연건동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개막하는 영국 신예작가 제이미 윌크스의 ‘카포네 트릴로지’는 예매 시작 1분 만에 1차분(600석)이 전량 판매됐다.

세 작품 모두 한국 초연이다. 이들 작품은 말은 하지만 상대가 듣지 못하고(스피킹 인 텅스), 인물의 독백으로 극의 60% 이상이 전개되며(프로즌), 시대를 뛰어넘은 옴니버스 3부작으로 극이 구성되는(카포네 트릴로지) 등 독백이나 형식 파괴로 연극성을 강화한 게 특징이다.

프로즌은 소아성애자 연쇄살인범 랄프에게 아이를 잃은 엄마 낸시가 랄프에 대한 복수심에 이어 용서라는 신념에 이르는 과정을 그렸다. 아이를 잃어버린 날이나 범인이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하는 과정 등 굵은 서사를 마치 시를 읽는 듯한 독백으로 표현한다. 카포네 트릴로지는 지난해 에든버러 프린지페스티벌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한 화제작이다. 한 호텔방에서 1923년과 1934년, 1943년에 벌어지는 세 가지 사건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려낸다.

전문가들은 영미권 현대극이 흥행하는 이유로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대사, 시공간의 연속성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구성을 꼽는다. 관객이 극에 적극 참여하게 하고,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구성과 잘 짜인 대본, 간소화한 무대 독백으로 전달하는 메시지가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는 설명이다.

카포네 트릴로지를 번역한 성수정 씨는 “영미권에서 인정받는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구성이 탄탄하고,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고 있다”며 “무엇보다 ‘말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드라마의 본질적 재미와 즐거움을 충족시켜 준다”고 설명했다. 조재현 수현재컴퍼니 대표는 “몇 년 전부터 영화와 TV 드라마에선 경험할 수 없는 연극적인 기법으로 대사와 무대 자체에 집중하는 작품에서 재미를 찾게 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마니아 관객’이 많아졌다”며 “스피킹 인 텅스도 일반 관객에게는 어려울 수 있지만 마니아 관객을 매료시킬 만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극의 60%가 독백…'형식파괴' 현대 영미극 거센 돌풍
영미권 현대극 열풍이 이어지면서 미국 영국에서 주목받은 최신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필로우맨’ ‘히스토리 보이즈’ 등을 국내에 들여와 성공시킨 노네임씨어터컴퍼니의 한해영 대표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최근 10년간 토니상을 받은 다양한 작품 풀(pool)에서 좋은 작품을 골라 들여왔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연극 기획·제작자들이 이제 막 무대에 오른 작품에도 눈독을 들이면서 급이 낮은 작품도 줄줄이 들어오고 있다”며 “한국 창작연극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말의 힘으로 감정 표현…이게 진짜 연극이죠”
‘카포네 트릴로지’ 마피아 役 이석준


극의 60%가 독백…'형식파괴' 현대 영미극 거센 돌풍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넘나드는 배우 이석준(43·사진)은 유독 현대영미극 무대에 자주 선다. ‘스테디 레인’의 대니, ‘엠버터플라이’의 르네, ‘프로즌’의 랄프에 이어 14일 개막하는 ‘카포네 트릴로지’에서 보스를 잃은 마피아 역을 맡았다. 서울 대학로에서 연습에 한창인 그를 만났다.

“프로즌에서 연쇄살인범(랄프) 연기를 할 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다행히 카포네 트릴로지는 로맨스가 가미된 누아르예요. 어제는 사이코패스를 연기하고, 오늘은 젊은 친구들과 유쾌하게 연습하고 있습니다.”

영미권 현대극이 대학로에서 인기를 끄는 데 대한 생각도 밝혔다. “뮤지컬이 등장한 이후 화려한 무대로 승부를 보는 시대가 되면서 ‘연극은 죽었다’는 말까지 나왔죠. 그러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극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화려함은 줄이고 독백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메우는 작품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이죠.”

무대는 간소화되고, 시공간이 이리저리 얽히며 독백 등 대사가 많아졌다. 깊은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가장 연극적인 방법은 결국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독백과 형식 파괴로 이어진 무대는 연극을 처음 접하는 관객에겐 어렵고 지루할 수 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연극적인 것으로의 ‘회귀’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