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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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界)의 옥찬(玉饌)이 아니면 마계(魔界)의 기미(奇味)다.’ 어류학자 정문기는 ‘어류박물지’라는 책에서 복어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늘나라의 진수성찬(玉饌)이거나 악마들이 즐기는 기이한 맛(奇味)이라는 뜻이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복어는 늘 그렇게 미식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서울 서초동 복요리 전문점 강남복집에서 조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58)을 만났다. 23년 전통을 지닌 이 집은 복김치탕으로 유명하다. 조 사장은 “미식가라고 소문낼 정도는 아니지만 산업자원부에 근무하던 시절 선배인 한준호 삼천리 회장을 따라 이 집에 와본 뒤 제대로 된 복 맛을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단골인데 뜨끈한 복탕이 숙취 해소에 아주 좋다”며 복다다키(살짝 구운 복어) 코스를 주문했다. 음식을 나르던 남재현 강남복집 사장은 “복은 지방이 적어 성인병 예방에 좋고 몸에 쌓인 노폐물 배출에도 도움을 준다”고 거들었다.

경제학이 좋았던 외교학도

[한경과 맛있는 만남] 조석 "원전비리 터진 후 사장 임명돼…'왜 하필 이런 때 맡기나' 생각도"
조 사장은 경제관료 출신이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고시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인 스물다섯 살에 행시에 합격했다. 2013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31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수원 사장을 맡았다. 왜 행정고시를 봤느냐는 질문에 조 사장은 “외교학과에 다녔지만 경제학이 좋았다”고 말했다. “정부 주도로 한국 경제의 외형을 키웠던 1980년대에 대학에 다니다 보니 자연히 정부 경제 정책에 관심이 많았어요. 중화학공업이 집중 육성되는 걸 보면서 친구들과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 같은 주제를 놓고 토론도 많이 했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종업원이 복어회를 살짝 구워 얼음물에 식힌 복다다키를 내왔다. 미나리와 무순을 구운 복으로 감싸 간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복의 쫄깃한 식감과 쌉싸름한 미나리의 뒷맛이 잘 어울렸다. 함께 나온 복 껍질 무침은 간장에 레몬 양념이 더해져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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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요리에 술이 빠질 수 없지”라며 소주를 시킨 조 사장이 술을 가득 채운 잔을 기자에게 권했다. 술잔을 받으며 공직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때를 물었다. “아무래도 2005년 경주가 원자력발전소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을 유치하도록 했을 때죠.” 모든 후보 지역 주민이 거세게 반대하던 방폐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 사장은 2004년 2월 미국 연수를 채 끝마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소환됐다. 당시 원전사업기획단장을 맡은 조 사장은 방폐장 후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주민투표를 시행해 찬성률이 가장 높은 지역에 방폐장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기피시설물 건설을 주민투표로 결정한 첫 사례다. “매일 주민들을 직접 만나 방폐장 유치를 설득하던 날들이었죠. 당시 주민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올해 말이면 한수원 본사가 경주로 이사하네요. 하하.”

“원전 엘리트주의 걷어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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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다다키를 비우자 복 고니와 복어 불고기, 복어 초밥이 차례로 나왔다. 살짝 구운 고니는 순두부처럼 말랑말랑해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없어졌다. 쫄깃한 복어 회를 밥에 얹은 초밥은 젓가락을 자꾸 불러 금세 접시가 깨끗해졌다. 원전 부품 납품 비리와 잇따른 안전 사고로 바람잘 날 없었던 2013년 한수원 사장직을 수락한 이유를 물었다. “나도 바보가 아닌데 위험한 길이라는 걸 왜 몰랐겠어요. 처음엔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을 맡기나’ 했죠. 그래도 흐트러진 공기업을 수습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힘드니까 못하겠다’는 말은 도저히 안 나오더라고요.”

전주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옛 지식경제부에서 승승장구하던 조 사장의 학창 시절과 관료 시절을 굳이 점수로 매긴다면 A학점에 가깝지 않을까. 하지만 지난달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4년 공공기관 평가에서 조 사장은 ‘기관장 경고’ 조치를 받았다. 한수원에 대한 평가는 D였다. 신고리원전 3호기 가스 누출로 인한 인명사고와 원전 도면 해킹 사건 등이 악영향을 미쳤다. 조 사장은 앞에 놓인 잔을 비우며 “사고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원전 종사자 사이에 (전문적 기술이 필요한 일은 전문가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엘리티즘(elitism)’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제품 품질에 대한 방심이 있었어요. 최근엔 실·처장급 임원의 40%를 외부 인력으로 바꿨습니다.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면서 한수원 특유의 폐쇄적인 문화를 바꾸고 사고율을 더 낮추려고 노력 중입니다.”

“답은 현장에 있다”

2012년 원전 비리가 터진 뒤 한수원이 ‘원전 마피아’ 집단으로 지목되자 직원들은 크게 위축됐다. 비리 사태 이후 출퇴근 때 늘 입고 다니던 회사 점퍼도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뒀다는 직원이 많았다. ‘직원의 능력과 사기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OK)’라는 지론을 가진 조 사장은 “문제 일으키지 않고 묵묵하게 일하던 직원들의 패배의식을 씻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열흘에 한 번꼴로 현장에 나갔다. 취임 이후 1년8개월 동안 3만㎞가 넘는 거리를 다녔다. 처음엔 주변에서 ‘현장에 너무 자주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실무자들이 의전 때문에 힘들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한수원은 현장이 전부인 회사예요. 원전에 문제가 생기면 그날로 회사 수명도 다하는 겁니다. 직원들이 힘들어한다고 사장이 서울에 앉아 입으로만 공장 얘기를 하는 것은 난센스죠. 부임하고 얼마 안돼 ‘의전부터 다 없애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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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장의 ‘현장 철학’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 강남복집의 대표 메뉴인 복김치탕이 나왔다. 음식을 내오던 사장이 “제주도에만 있는 음식”이라며 “직접 담근 김치와 집에서 기른 콩나물, 복을 넣고 끓인 탕”이라고 설명했다. 맵지 않으면서도 개운했다. 탕이 나오자 자연스레 소주잔이 한 바퀴 더 돌았다. 직원들을 만나면 주로 어떤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직원들의 애사심을 다잡는 데 특히 신경을 써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수원이라는 회사가 참 좋은 회사잖아요. 공익성과 안전성, 미래 비전까지 있으니까요. 이런 점을 틈만 나면 직원들 붙잡고 얘기합니다.”

순례길 걸을 때 가장 행복

그의 공직 생활은 비교적 평탄했다. 공직에서 벗어난 이후엔 대형 공기업인 한수원 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의 인생에도 힘든 일이 있었을까. “내가 힘들었다고 하면 누군가는 우습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2011년 차관 승진을 하지 못하고 1급으로 사표 냈을 때는 많이 힘들었어요.”

‘술은 기분 좋을 때만 마신다’는 조 사장은 퇴직 위로주를 사겠다는 지인들을 뒤로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스페인과 프랑스 접경에서 시작하는 이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에 이른다.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절반가량을 부인과 함께 하루 25㎞씩 꼬박 20박21일 동안 걸었다.

그는 “하루에 열 시간씩 걷다 보면 30분 정도는 정신이 맑아지는 때가 찾아온다”며 “그때 31년간의 공직생활을 떠올려가며 마음을 정리했다”고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크루아상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화살표만 따라 걷다 보면 마을 안 성당을 거쳐요. 성당 앞에 앉아 부인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기도문을 외운 뒤 엉덩이 털고 일어나 또 걷는 거죠. 그 전까진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생각도, 여유도 없었죠. 그때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었어요.”

모두가 술이 얼큰해졌을 즈음 식당 주인이 토마토 셔벗을 후식으로 가져왔다. 얼린 토마토에 설탕을 넣어 간 셔벗을 한 입 넣으며 조 사장은 “순탄했던 인생은 부인을 잘 만난 덕”이라고 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참 맞는 말이에요.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못 챙기면서 나랏일을 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죠.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허상을 좇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공무원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한경과 맛있는 만남] 조석 "원전비리 터진 후 사장 임명돼…'왜 하필 이런 때 맡기나' 생각도"
조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의 단골집 강남복집
콩나물 듬뿍 제주도式 복김치탕…개운한 ‘바다의 맛’


[한경과 맛있는 만남] 조석 "원전비리 터진 후 사장 임명돼…'왜 하필 이런 때 맡기나' 생각도"
서울 서초동에 있는 복요리 전문점 강남복집은 1992년 문을 열었다. 서초동 뱅뱅사거리에서 시작한 이 집은 지하철 2호선 서초역 부근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2년 삼성전자 사옥 앞 서초타운 트라팰리스 2층으로 다시 이전했다. 2호선 강남역 6번 출구에서 우성아파트 사거리 방향으로 걷다가 KB국민은행 삼성타운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간판이 보인다.

내부는 깔끔하다. 50여석의 좌석을 갖추고 있다. 방이 따로 6개 있어 회식이나 거래처 만남에 좋다. 20명까지 모임을 할 만한 방도 하나 있다. 주 요리는 복김치탕, 복아욱된장탕, 복다다키, 복죽, 복냉메밀국수, 녹차굴비 등이다. 오랜 단골은 대부분 복과 직접 담근 김치, 집에서 기른 콩나물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 대표 메뉴 복김치탕(4만원)을 먹으러 온다. (02)3486-0252

“남은 임기 1년2개월…고리1호기 해체 주력”

2013년 9월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에 취임한 조석 사장에게 남은 임기는 1년2개월이다. ‘고리원전 1호기 안전 정지 및 해체준비 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고 있는 그는 남은 임기 동안 2017년 폐로 예정인 고리 1호기 해체준비 작업에 주력할 예정이다. 선진국 대비 80% 수준인 한국의 원전 폐로 기술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게 목표다. 이달 말 상업 운전하는 신월성 2호기(설비용량 100만㎾급)의 안전성도 챙기고 있다.

심성미/임원기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