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서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57·사진)은 최근 30~40년간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기업지배구조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캐드버리 리포트’는 기업지배구조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대헌장)’격이다. 감사위원회를 설치해 이사회를 감독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린버리 리포트(1995년)’에 이어 기업지배구조의 바이블로 통하는 ‘햄펠 코드(1998년, 사외이사가 최소한 3분의 1이상이 돼야 한다고 권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박 원장은 설명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2002년 6월 한국거래소 금융투자협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 등의 참여로 발족된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의결권 자문서비스와 지배구조 평가업무 등을 하고 있다. 박 원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학위를 땄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대학원에서 재무관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와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 상장공시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와 재무에 정통한 학자다. 지난달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해 주목받았다. 합병주총(7월17일)에서 결의안이 통과된 뒤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투명성과 책임성이 기업지배구조의 키워드”
-기업 지배구조란 한마디로 무엇인가.
“회사의 경영진이 주주 가치와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도록 책임과 역할을 더하는 장치다. 대주주를 포함한 경영진과 소액주주, 채권자, 종업원 등 기업의 이해당사자들의 역학관계를 총칭하기도 한다. 투명성(transparency)과 신뢰성(integrity), 책임성(accountability)이 기업지배구조의 키워드다. 영국에선 런던 증권거래소가 기업지배구조 모범규범을 상장 규정에 반영하고 있다.”
-국민연금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는데.
“올해 2월 국민연금과 1년 단위 의결권 자문서비스를 제공하기로 계약했다. 국민연금은 600개 상장사의 기업지배구조를 분석하기를 원했다. 저희 기업지배구조원이 코스피 대형기업 위주로 400개를, 나머지 200개는 민간 의결권 자문회사인 서스틴베스트(대표 류영재)가 분석해 보고서를 전달했다. 400개 가운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들어있다. 보고서 내용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자산운용사나 연기금에 리포트를 보내면 거기에서 내용이 공개되기도 한다.”
-합병을 반대한 것으로 이미 알려졌다. 근거가 무엇인가.
“합병과정이 적법했지만 적절하지 않았다. 소액주주에 대한 배려가 충분치 않았다. 두 회사가 지난 5월26일 이사회를 열어 합병비율 1대0.35를 결정했다. 국내법상 무리가 없다. 합병 결의 시점이 문제다. 저희가 제일모직 상장이후 두 회사의 상대가격 비율을 6개월간 계속 추적해봤다. 합병을 결의한 날의 삼성물산 상대가격이 가장 낮았다. 10억원짜리 주택을 갖고 있는 집주인에게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시세가 7억원으로 떨어졌을 때 덜컥 팔라고 한 격이다. 또 하나 이슈는 두 회사의 지배주주가 같은데 제일모직의 오너 일가 지분은 40%이고 삼성물산은 이건희 회장 지분 1.4%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적법하지만 적절치 못하다”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했다는 이야긴가.
“그렇다. 합병비율이 1대 0.35가 아니라 1대 0.4정도만 되어도 국민연금이 1000억원 이상의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사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뿐 아니라 제일모직 주식도 갖고 있었다. 공시의무가 없는 5%이하를 갖고 있었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주주 입장에서만 보고서를 써달라고 했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갖고 있는 미국의 헷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주장한 것처럼 삼성물산 주주로서 억울한 것은 분명하다. 삼성물산이 갖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 등 계열사 주식가치 등 순자산가치를 고려하면 그렇다.”
-또다른 문제가 있나.
“회사 자산에 대한 권리가 주주에게 있는데 왜 특정 지배주주의 다른 회사 경영권 유지를 위해서 다른 삼성물산 주주가 손해를 봐야 하느냐는 이슈가 있다. 두 회사의 실질적인 지배권 즉 경영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동일인인데 한쪽만 유리하게 합병비율을 결정할 수 있도록 시점을 정한 게 문제다. 저희 원이 시가에 의한 합병비율 메카니즘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합병비율 관련 규정을 보완해야 하나.
“현행 자본시장법상 합병주가를 ±10% 조정할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사례는 없다. 삼성측에서도 사례도 없는데 조정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상장사끼리의 합병 비율은 자본시장법 시행령 제176조 5항에 따라 합병결의 직전 최근 1개월 평균 종가, 1주일 평균종가, 결의 전일 종가를 산술 평균해 계산한다. 그 결과 제일모직 15만9294원, 삼성물산 5만5767원으로 1대0.35의 비율이 나온 것이다. 삼성물산의 합병주가를 10% 더쳐주고, 제일모직 합병주가를 10% 깎으면 20% 가량 차이가 난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에 1조원 가량 투자했으니까 2000억원 정도 플러스 마이너스가 가능하다. 소액주주 입장에서도 자기 주식 재산가치가 20% 변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용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절차상 문제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 다만 또 한가지가 있다. 이런 중대한 사안은 이사회에서 충분히 논의가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외이사는 주주의 권익을 대변해 경영진의 의사결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 의무(fiduciary duty)가 있다. 누가봐도 가장 불리한 시점에 합병을 결의했는데 삼성물산 사외이사들은 이사회 전날 안건을 받았다고 한다. 합병이란 양사에 대한 가치평가 등 판단해야 할 사항이 매우 많은 어려운 의사결정이다. 이를 책임지는 이사회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합병의 결정시점과 조건 등이 전체 주주의 입장에서 문제가 없는 지를 고민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절차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삼성물산 사외이사들 합병안건 하루 전에 받았다”
-의견서를 낼 때 너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나.
“저희 원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런 경우 반대가 확실하다. 실무팀의 사전 검토를 거쳐 내부 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원장이 사후적으로 보고받았다. 그런 과정에서 거의 완전하게 의견이 일치했다. 적어도 지배구조관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지배구조원이나 국민연금이 요구한 기준, 외국의 일반적인 기준이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어 저희 원은 사외이사의 적격성을 조사할 때 전직 직장에서의 이사회 출석률이 3분의2 이상이어야 적격으로 본다. 국민연금은 수치가 다를 수 있다. 비슷한 항목에 컷오프 라인이 좀 다를 수 있지만 큰 차이가 없다. 기본적인 원칙은 주주가치 제고에 부합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기업지배구조 평가는 어떻게 하는가.
“주주권리 보호, 이사회, 공시, 감사, 경영과실 분배 등 크게 다섯가지 영역으로 나눠 가늠한다. 정관상에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사채발행한도를 정한 경우 주주권 보호 항목에 점수를 높게 받는다. 발행한도가 정해지지 않으면 특정 주주에게 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사채가 저가 발행돼 주권이 희석화(dilution)된다. 소유구조도 중요하다. 지배주주가 존재하거나 그 지배주주가 많은 지분을 가질수록 소액주주와 이해가 일치돼 높은 점수를 받는다. 오너 지분이 5%이상, 10%이상, 25%이상일 때 갈수록 높은 점수를 주는 방식이다. 지분이 낮은 대주주가 경영권을 갖게 되면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어진다. 극단적으로 무능해도 되며 회사돈을 빼먹어도 내 경제적 손실은 거의 없게 된다. 간접 지분이 많은 게 한국기업 지배구조의 큰 문제다.”
-삼성물산 합병의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두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오너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확보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그동안 비상장 자회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이른바 터널링(tunneling·부의 이전)을 외국인투자자가 많이 지적했다. 지분은 적으면서 경영권을 독점하고 그로 인해 승계가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게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약점이다. 그런점에서 합병후 삼성물산의 지배주주 지분이 높아지게 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대주주와 다른 주주의 이해관계가 더 많이 일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두 회사의 시너지 효과 문제는 논란이 많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한국 자본시장이 부정적인 지배구조 악용·남용하고 있다.“
-엘리엇이 삼성물산 주식을 팔 것이란 관측도 있다. 주가는 어떻게 될까.
“주가는 모르겠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합병전까지 오너일가가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회사의 주가가 무조건 올랐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찌보면 한국 지배구조의 문제다. ‘합병비율이 오너일가에 유리하게 결정될 것이다’라는 기대감이 시장에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부정적인 지배구조 측면을 시장이 악용하거나 방관하는 것이다. 외국같으면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왜 특정인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경영 의사결정을 당신이 했느냐’라며 배임 소송이 일어난다. 오너 일가가 세운 비상장 계열사가 상장 계열사와 거래하는 구조도 찾아볼 수 없다. 근본적으로 배임 위험을 막기 위해 상장된 지주회사가 있고 나머지 비즈니스를 자회사로 두되 상장사가 100% 가까운 지분을 가진다. 그러면 이해상충 문제가 전혀 없다.”
-엘리엇이 삼성물산 합병에 대해 투자자·국가간 소송(ISD)을 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찔러보기일 뿐이다. 실제로 소송에서 이길 것으로 기대할 것 같지는 않다. 시가평가에 의해 상장회사 합병비율을 정한다는 게 한국의 통일된 룰인데 그게 외국인에게 특별히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때로는 외국인에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다. 중립적인 규제다. 그걸 ISD까지 끌고 갔을 때 판사가 엘리엇의 주장을 들어줘서 합병 무효화한다든지 그럴 가능성은 없다.”
-삼성물산 사태가 다른 대기업들에 주는 영향은.
“반드시 삼성 이슈는 아니더라도 SK 등 우리나라 30대 재벌 오너일가 지분이 3%이내다. 일부 그룹은 1%이내다. 물론 10% 가까운 곳도 있다. 이는 외국의 전문경영자 수준이다. 그동안 관행적으로 모자라는 것을 계열사 지분으로 메웠다. 이해는 된다. 급속한 성장과정에서 증자하는 것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 오너 일가의 주머니돈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과도기적인 현상은 있었는데 어쨌거나 그 틈새를 외국자본이 노릴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가운데 오너 일가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나타나면 그것은 외국인의 좋은 공격 타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대기업들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적법성만 따지지 말고 적절한가를 고려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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