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중림동 한경갤러리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세계 속의 한국화’전에 출품된 남농 허건의 ‘추강어락도’.
서울 중구 중림동 한경갤러리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세계 속의 한국화’전에 출품된 남농 허건의 ‘추강어락도’.
조선시대 도화서의 마지막 궁중 화원인 소림 조석진(1853~1920)은 심전 안중식과 쌍벽을 이루는 한말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을 인정받아 영춘군수(永春郡守)까지 지낸 그는 1911년 한국 최초 미술교육기관 ‘서화미술회’에 초대 교수로 활동하며 김은호, 허백련, 박승무,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등 근대 6대 한국화가를 배출했다.

소림을 비롯해 의제 허백련, 남농 허건, 이당 김은호, 월전 장우성, 운보 김기창, 현초 이우태, 산정 서세옥 등 쟁쟁한 근·현대 한국화 거장 10여명의 작품을 모은 전시회가 열린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10일부터 오는 27일까지 펼치는 ‘세계 속의 한국화’전이다. 전통적인 우리 그림의 세계화를 조명하는 이번 전시에는 한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독특한 예술세계로 승화한 작가들의 작품 20여점을 내보인다. 조선후기 이후 한국화의 발전 과정과 미술사적 의미를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기회다.

출품작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맥을 잇는 그림부터 화려하고 세미한 채색화, 미니멀리즘처럼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문인화까지 망라해 한국화의 프리즘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소림의 대표작 ‘석모란’은 인왕산 기슭에서 자생한 모란의 자태를 묘사했다. 송곳처럼 뾰쪽하게 솟은 바위는 북방계의 강한 필묘로, 넓은 꽃잎은 부드러운 남방계의 묵묘로 처리해 극단적인 음양 대비를 보여준다. 바위가 꽃을 감싸는 음양조화의 우주관이 잘 드러나 있다.

남종화(南宗畵)의 대가 허백련(1891~1977)의 ‘설원’은 남도의 해안 절벽에 초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분위기를 붓 끝으로 녹여냈다. 절벽 정상 부분은 피마준(물결치는 필선)으로 부드럽게 처리하고, 해변과 절벽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으로 묘사하면서 변화를 준 게 흥미롭다.

그림의 소재를 현실과 일상에서 찾아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허건(1908~1987)의 작품으로는 ‘추강어락도’ ‘춘정’ ‘쌍솔’ 등 4점이 걸렸다. 목포 앞바다를 섬세한 필치로 그린 ‘추경어락도’에서는 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일상을 포착한 남농 특유의 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세필과 채색인물화로 유명한 김은호(1892~1979)의 매 그림도 모습을 드러낸다. 바닷가 바위에 앉아 사방을 경계하는 매의 매서운 부리와 눈초리를 극사실적으로 그려내 세필화의 거장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마치 소슬바람이 불듯 한국의 자연을 조촐하게 묘사한 이상범(1897~1972)의 ‘하경’도 눈길을 붙잡는다.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나지막한 언덕과 산 등 일상적인 자연을 안정된 수평구도로 그려낸 청전의 손맛을 듬뿍 전해준다.

1000원권 지폐에 나오는 퇴계 이황의 영정을 그린 이유태(1916~1999)의 ‘추정만리’, 달밤에 포효하는 호랑이의 자태를 드라마틱하게 잡아낸 내고 박생광의 ‘월야일성’과 ‘금강산 수미탑’, 청포와 매화나무 아래서 노니는 원앙새의 유희를 그린 성재휴의 ‘춘정’, 하늘보다 더 큰 뜻을 담아낸 김기창의 ‘능소화’에서도 원초적인 한국화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한경갤러리 측은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법고(法古)로부터 창신(創新)이 나오기까지 작가 자신만의 한국화 정체성을 찾아가는 각기 다른 시도를 하나로 모은 전시”라고 말했다. 관람료는 없다.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