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아모레퍼시픽 "믿을 건 R&D"…중국·동남아 'K-뷰티'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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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기업'의 도전과 열정 (2) 아모레퍼시픽
프랑스서 뼈아픈 실패…재고 화장품 불태워
1990년대 위기 맞다
금융·패션·IT 무분별한 다각화, 회사 휘청…화장품 빼고 모두 정리
중국 진출 15년 만에 흑자
병원·대학 손잡고 여성 피부 분석…중국인 위주로 영업본부 꾸려
프랑스서 뼈아픈 실패…재고 화장품 불태워
1990년대 위기 맞다
금융·패션·IT 무분별한 다각화, 회사 휘청…화장품 빼고 모두 정리
중국 진출 15년 만에 흑자
병원·대학 손잡고 여성 피부 분석…중국인 위주로 영업본부 꾸려
“경배야, 화장품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1992년 폐암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던 서성환 태평양(지금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회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차남 서경배 태평양제약 사장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1945년 창립 이후 국내 화장품시장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태평양이지만 회사 안팎의 경영 상황은 어두웠다. 화장품 수입 개방(1986년) 이후 외국 브랜드가 물밀 듯 들어오면서 1970년대 70%를 넘던 태평양의 시장점유율은 20% 아래로 뚝 떨어졌다.
재계의 사업다각화 열풍에 편승해 금융부터 패션,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벌여 놓은 것도 골칫거리였다. ○‘화장품 한우물’ 선제적 구조조정
태평양은 과감한 구조조정에 나섰다. 제1원칙은 ‘미(美)와 건강에 관련 없는 사업은 전부 정리한다’는 것. 증권, 경제연구소, 투자자문, 생명보험, 프로야구단, 정보기술, 금속, 잉크 등의 계열사를 1990년대 모조리 매각했다.
1996년 거평그룹에 태평양패션을 팔 때는 유상증자로 150억원을 얹어 매각하는 국내 최초의 ‘마이너스 인수합병(M&A)’까지 했다. 태평양의 구조조정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조조정이 마무리돼가던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가 이어졌지만 태평양은 일찍 ‘군살빼기’에 나선 덕에 큰 화를 면했다. 당초 태평양의 후계구도는 장남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이 건설·증권·금속 등을, 차남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화장품을 맡는 쪽으로 정리돼 있었다.
하지만 서경배 회장이 주도한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서 그는 그룹 후계자 자리에도 오르게 됐다. 서경배 회장은 “사업 다각화 실패의 후유증을 걱정하며 유언처럼 남긴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구조조정에 힘을 쏟았다”며 “외환위기 때 더 강한 기업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무모한 프랑스 진출, 4년 만에 철수
화장품에 승부를 건 이상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내수시장을 벗어나 해외로 나가야 했다. 태평양은 1990년대 초 프랑스와 중국에 잇따라 현지법인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샤넬, 로레알, 에스티로더 등 쟁쟁한 글로벌 화장품 회사가 꽉 잡고 있는 선진국 시장에서 한국 화장품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태평양은 1990년 프랑스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현지 공장까지 매입해 ‘순정’이라는 브랜드를 야심차게 내놨다. 하지만 결과는 50억원의 순손실만 남긴 참패였다.
서경배 회장은 1994년 프랑스 사업 철수를 결정한 뒤 현지로 날아가 먼지만 뽀얗게 쌓인 화장품을 직접 거둬들였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수거한 화장품을 불태운 그는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시장의 반응은 이토록 냉담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에서 해외 진출의 토대를 다져가기로 했다. ‘프랑스 실패’를 교훈 삼아 과감한 R&D와 철저한 시장 조사에 매달렸다. 무엇보다 중국인의 마음을 얻는 데 주력했다. 중국 진출 초기부터 현지인을 핵심 요직에 앉혔다. 서 회장은 중국인이 ‘세계에서 자존심도 가장 강한 민족’임을 꿰뚫어봤다.
그는 “지금은 ‘중국 공포증’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이 두려운 상대가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렇게 중국인을 대우하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
서 회장은 영업본부를 중국인 위주로 꾸렸고, 2002년 상하이 법인을 세우면서 중국 여성을 법인장으로 앉혔다. 중국 현지 대학 및 피부과 병원과 손잡고 중국 여성 5200명의 피부 특성을 분석하고 천연 약재도 공동 연구했다. 서 회장 역시 수시로 중국 화장품박람회에 참석해 업체를 상대하고 주요 매장을 구석구석 돌았다. 중국 진출 15년 만인 2007년, 드디어 중국에서 흑자를 냈다.
○중국 성공 업고 미국·유럽 재도전
오랫동안 공들인 중국사업은 2010년대 들어 빛을 발했다.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국 화장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 것. 2011년 1909억원이던 아모레퍼시픽의 중국 매출은 2014년 4673억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각축전을 벌이는 중국에서 아모레퍼시픽은 ‘한국 회사만이 만들 수 있는 특화상품으로 승부한다’는 전략을 고수했다.
새롭게 출시한 브랜드는 한국적인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것들이다. 한방화장품 설화수(2011년), 제주산 원료를 사용한 이니스프리(2012년), 한류스타를 활용한 에뛰드(2013년) 등의 매장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중국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아모레퍼시픽은 미국과 유럽 공략에 다시 고삐를 죄고 있다. 프랑스에서 2011년 현지 향수 브랜드 ‘아닉구탈’을 인수해 설욕전에 나섰다. 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800여개 매장에 ‘라네즈’를 입점시켜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1999년 2만원을 밑돌던 회사 주가가 400만원 선(액면분할 전)으로 치솟았던 것도 아모레퍼시픽의 해외사업이 꾸준히 성장할 것이란 시장 기대가 반영된 결과였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
1992년 폐암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던 서성환 태평양(지금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회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차남 서경배 태평양제약 사장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1945년 창립 이후 국내 화장품시장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태평양이지만 회사 안팎의 경영 상황은 어두웠다. 화장품 수입 개방(1986년) 이후 외국 브랜드가 물밀 듯 들어오면서 1970년대 70%를 넘던 태평양의 시장점유율은 20% 아래로 뚝 떨어졌다.
재계의 사업다각화 열풍에 편승해 금융부터 패션,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벌여 놓은 것도 골칫거리였다. ○‘화장품 한우물’ 선제적 구조조정
태평양은 과감한 구조조정에 나섰다. 제1원칙은 ‘미(美)와 건강에 관련 없는 사업은 전부 정리한다’는 것. 증권, 경제연구소, 투자자문, 생명보험, 프로야구단, 정보기술, 금속, 잉크 등의 계열사를 1990년대 모조리 매각했다.
1996년 거평그룹에 태평양패션을 팔 때는 유상증자로 150억원을 얹어 매각하는 국내 최초의 ‘마이너스 인수합병(M&A)’까지 했다. 태평양의 구조조정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조조정이 마무리돼가던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가 이어졌지만 태평양은 일찍 ‘군살빼기’에 나선 덕에 큰 화를 면했다. 당초 태평양의 후계구도는 장남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이 건설·증권·금속 등을, 차남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화장품을 맡는 쪽으로 정리돼 있었다.
하지만 서경배 회장이 주도한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서 그는 그룹 후계자 자리에도 오르게 됐다. 서경배 회장은 “사업 다각화 실패의 후유증을 걱정하며 유언처럼 남긴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구조조정에 힘을 쏟았다”며 “외환위기 때 더 강한 기업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무모한 프랑스 진출, 4년 만에 철수
화장품에 승부를 건 이상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내수시장을 벗어나 해외로 나가야 했다. 태평양은 1990년대 초 프랑스와 중국에 잇따라 현지법인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샤넬, 로레알, 에스티로더 등 쟁쟁한 글로벌 화장품 회사가 꽉 잡고 있는 선진국 시장에서 한국 화장품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태평양은 1990년 프랑스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현지 공장까지 매입해 ‘순정’이라는 브랜드를 야심차게 내놨다. 하지만 결과는 50억원의 순손실만 남긴 참패였다.
서경배 회장은 1994년 프랑스 사업 철수를 결정한 뒤 현지로 날아가 먼지만 뽀얗게 쌓인 화장품을 직접 거둬들였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수거한 화장품을 불태운 그는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시장의 반응은 이토록 냉담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에서 해외 진출의 토대를 다져가기로 했다. ‘프랑스 실패’를 교훈 삼아 과감한 R&D와 철저한 시장 조사에 매달렸다. 무엇보다 중국인의 마음을 얻는 데 주력했다. 중국 진출 초기부터 현지인을 핵심 요직에 앉혔다. 서 회장은 중국인이 ‘세계에서 자존심도 가장 강한 민족’임을 꿰뚫어봤다.
그는 “지금은 ‘중국 공포증’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이 두려운 상대가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렇게 중국인을 대우하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
서 회장은 영업본부를 중국인 위주로 꾸렸고, 2002년 상하이 법인을 세우면서 중국 여성을 법인장으로 앉혔다. 중국 현지 대학 및 피부과 병원과 손잡고 중국 여성 5200명의 피부 특성을 분석하고 천연 약재도 공동 연구했다. 서 회장 역시 수시로 중국 화장품박람회에 참석해 업체를 상대하고 주요 매장을 구석구석 돌았다. 중국 진출 15년 만인 2007년, 드디어 중국에서 흑자를 냈다.
○중국 성공 업고 미국·유럽 재도전
오랫동안 공들인 중국사업은 2010년대 들어 빛을 발했다.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국 화장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 것. 2011년 1909억원이던 아모레퍼시픽의 중국 매출은 2014년 4673억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각축전을 벌이는 중국에서 아모레퍼시픽은 ‘한국 회사만이 만들 수 있는 특화상품으로 승부한다’는 전략을 고수했다.
새롭게 출시한 브랜드는 한국적인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것들이다. 한방화장품 설화수(2011년), 제주산 원료를 사용한 이니스프리(2012년), 한류스타를 활용한 에뛰드(2013년) 등의 매장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중국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아모레퍼시픽은 미국과 유럽 공략에 다시 고삐를 죄고 있다. 프랑스에서 2011년 현지 향수 브랜드 ‘아닉구탈’을 인수해 설욕전에 나섰다. 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800여개 매장에 ‘라네즈’를 입점시켜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1999년 2만원을 밑돌던 회사 주가가 400만원 선(액면분할 전)으로 치솟았던 것도 아모레퍼시픽의 해외사업이 꾸준히 성장할 것이란 시장 기대가 반영된 결과였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