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표준시의 주권
북한이 현재 표준시보다 30분 늦은 독자적인 표준시를 쓰겠다고 발표했다. 한반도 중앙을 지나는 동경 127.5도 기준의 표준시를 쓰겠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뺏긴 표준시를 되찾는 것’이라는 게 이유다.

하지만 시간은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글로벌 무대에서 함께 쓰는 기준이다. 당장 남북교류나 외교관계 등에 어려움을 줘 “실리를 포기하고 거꾸로 간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과연 독자 표준시를 쓰겠다고 선언하는 게 시간의 독립이나 주권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는 우리 고유의 기술로 만들어졌다. 2008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개발한 원자시계 ‘KRISS-1’은 오차가 단 300만년에 1초다. 국내 방송과 통신, 전자상거래와 컴퓨터 시간 정보 등의 기준을 제공한다.

지난해엔 1억년에 1초 오차가 나는 세계 최고 수준급 차세대 원자시계를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 정밀 시간측정 기술은 한국 정보통신,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산업 경쟁력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1988년 시작된 KRISS-1의 개발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기술적인 어려움과 장비 및 인력 부족 때문에 ‘한국 고유의 원자시계 개발’이란 목표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미국에선 자국의 원자시계를 도입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 과학자들은 한국의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시간표준이 타국의 기술로 구현되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많은 고생이 뒤따랐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영구자석을 사용한 다른 나라의 원자시계와 달리 우리는 레이저를 이용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KRISS-1을 만들어냈다. 이 시계는 높은 정확성으로 세계 각국에서 찬사를 받았다. 이런 노력이 뒷받침되면서 KRISS-1은 현재 전 세계가 통일된 시간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세계 협정시 생성에 기여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표준시인 KRISS-1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가연구개발 대표 성과로 당당히 선정됐다. KRISS-1 개발로 상징되는 시간의 독립이야말로 진정한 기술 주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광복절을 앞두고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노고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때다.

신용현 <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yhshin@kriss.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