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한국 경제 이끈 기업·기업인] 조선·자동차·반도체·IT…기업이 앞서 뛴 '한강의 기적'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국 경제를 바꾼 굵직한 사건들
1960년대까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가난해서 다른 나라에 손을 벌려야 했던 국가가 1945년 광복 이후 7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됐다. 기적을 이룬 주인공은 기업이다. 맨땅에서 시작해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정보기술(IT) 등 주요 산업을 세계 일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지난 70년간 한국 경제 성장의 이정표가 된 굵직한 사건들을 모아봤다.
첫 쇳물, 첫 차, 첫 선박…‘무한도전’의 1970년대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의 시대이자 대한민국 산업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개발 5대 전략을 발표했고, 1970년 포항제철소를 착공했다. 3년 뒤인 1973년 6월9일 오전 7시30분 포항제철소 용광로에서 검붉은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포항제철소는 365일 쉬지 않고 철강재를 생산했다. 조선 자동차 가전 건설 등 산업 발전의 뼈대가 됐다.
‘조선 강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도 1970년대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아직 조선소가 있지도 않은 때에 배를 살 사람을 찾아 다녔다. 울산 미포만 모래사장 사진 한 장과 지도, 영국에서 빌린 26만t급 유조선 도면을 들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곧 그리스의 한 선주로부터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1974년 6월28일 현대중공업 울산 본사에서는 정 명예회장이 수주한 ‘애틀랜틱 배런’호의 명명식이 열렸다.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수주한 배가 모습을 나타낸 순간이었다.
한국 최초의 승용차 ‘포니’도 1976년 2월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자동차를 독자적으로 제작하겠다고 하자 외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현대자동차 임직원과 엔지니어들은 세계에서 기술을 배워 개발 3년 만에 대한민국 최초, 세계 16번째, 아시아 2번째 고유모델인 포니를 개발했다.
광복 이후 산업 발전을 이끈 제품으로 다이너마이트도 빼놓을 수 없다. 한화그룹 창업주 고 김종희 회장은 1958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했다. 다이너마이트는 국토 재건사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각종 항만 도로 대교 건설 등에 크게 공헌했다.
반도체, 통신…미지의 길 개척한 1980~90년대
대한민국 반도체산업은 1960년대 후반 외국계 회사의 조립 생산에서 시작됐다. 당시 한국 전자산업은 라디오와 일부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1980년대 초반은 한국 반도체산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로 통한다. 국민이 반도체산업 중요성을 인식했고 한국전자가 바이폴라IC(1983년)를, 금성반도체가 마이크로프로세서(1984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1983년 ‘반도체 독립’을 선언했다. ‘왜 우리는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2·8 도쿄선언’을 발표하고 반도체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삼성은 첫 제품으로 D램을 선택했다.
반도체 관련 대규모 투자를 결심한 고 정주영 명예회장도 같은 해 현대전자를 설립했다. 삼성 금성 아남 현대 등 국내 업체들은 반도체산업에 본격 참여한 지 10여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 기술력 측면에서 일본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올라섰다. 이후 삼성이 1992년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일본 업체들을 꺾고 세계 1위에 등극했다.
섬유와 석유화학을 주업종으로 하던 SK그룹은 정보통신 분야를 차세대 성장사업으로 정했다. 1994년 민영화 대상이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4271억원에 인수했다. 1996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 방식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KT는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로 정부에서 분리됐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 국산 전전자(全電子) 교환기인 TDX를 개발해 대규모 전화 보급이 가능해졌다. 1996년에는 100명당 전화 보급률이 42.7명으로,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10번째로 TDX 개발에 성공해 미국 영국 등 통신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은 글로벌 기업으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건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었다. 이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꾸라”며 품질 중심의 신경영 선언을 했고, 삼성그룹은 이후 국내 기업들의 혁신을 선두에서 이끌며 글로벌 기업으로 부상했다.
LG그룹은 1995년 ‘LG’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이후 지속적인 성공을 일궜다. 1994년 30조원 수준이던 LG그룹의 매출은 지난해 150조원대가 됐다. GS라는 이름은 2004년 7월 등장했지만 그 뿌리는 LG와 같다.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과 식료품점을 하던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1947년 부산에서 락희화학공업사를 차려 화장품 장사를 했고, 이후 석유화학업에 눈을 돌리면서 회사를 키웠다. 고 허만정 공동창업주 가문과는 60년 이상 동행하다 GS가 2005년 LG에서 계열분리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포니 신화를 썼던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메이저 자동차회사로 성장했다. 현재 세계에서 완성차를 생산하는 국가는 20여개국이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산업을 육성해 독자 모델을 개발·생산하고 수출까지 성공한 유일한 나라다. 현대자동차가 포니 생산을 시작한 지 49년이 지난 현재 한국은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이 됐고, 연간 300만대를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화학공업의 강자 지위를 IT분야가 이어받았다. SK그룹은 정보통신분야를 신성장 사업으로 선정해 CDMA 등 글로벌 기술을 선도했다. 네이버 다음카카오 같은 신생 IT 기반 기업이 성장하며 IT 강국 코리아를 선도하고 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첫 쇳물, 첫 차, 첫 선박…‘무한도전’의 1970년대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의 시대이자 대한민국 산업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개발 5대 전략을 발표했고, 1970년 포항제철소를 착공했다. 3년 뒤인 1973년 6월9일 오전 7시30분 포항제철소 용광로에서 검붉은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포항제철소는 365일 쉬지 않고 철강재를 생산했다. 조선 자동차 가전 건설 등 산업 발전의 뼈대가 됐다.
‘조선 강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도 1970년대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아직 조선소가 있지도 않은 때에 배를 살 사람을 찾아 다녔다. 울산 미포만 모래사장 사진 한 장과 지도, 영국에서 빌린 26만t급 유조선 도면을 들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곧 그리스의 한 선주로부터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1974년 6월28일 현대중공업 울산 본사에서는 정 명예회장이 수주한 ‘애틀랜틱 배런’호의 명명식이 열렸다.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수주한 배가 모습을 나타낸 순간이었다.
한국 최초의 승용차 ‘포니’도 1976년 2월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자동차를 독자적으로 제작하겠다고 하자 외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현대자동차 임직원과 엔지니어들은 세계에서 기술을 배워 개발 3년 만에 대한민국 최초, 세계 16번째, 아시아 2번째 고유모델인 포니를 개발했다.
광복 이후 산업 발전을 이끈 제품으로 다이너마이트도 빼놓을 수 없다. 한화그룹 창업주 고 김종희 회장은 1958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했다. 다이너마이트는 국토 재건사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각종 항만 도로 대교 건설 등에 크게 공헌했다.
반도체, 통신…미지의 길 개척한 1980~90년대
대한민국 반도체산업은 1960년대 후반 외국계 회사의 조립 생산에서 시작됐다. 당시 한국 전자산업은 라디오와 일부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1980년대 초반은 한국 반도체산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로 통한다. 국민이 반도체산업 중요성을 인식했고 한국전자가 바이폴라IC(1983년)를, 금성반도체가 마이크로프로세서(1984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1983년 ‘반도체 독립’을 선언했다. ‘왜 우리는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2·8 도쿄선언’을 발표하고 반도체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삼성은 첫 제품으로 D램을 선택했다.
반도체 관련 대규모 투자를 결심한 고 정주영 명예회장도 같은 해 현대전자를 설립했다. 삼성 금성 아남 현대 등 국내 업체들은 반도체산업에 본격 참여한 지 10여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 기술력 측면에서 일본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올라섰다. 이후 삼성이 1992년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일본 업체들을 꺾고 세계 1위에 등극했다.
섬유와 석유화학을 주업종으로 하던 SK그룹은 정보통신 분야를 차세대 성장사업으로 정했다. 1994년 민영화 대상이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4271억원에 인수했다. 1996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 방식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KT는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로 정부에서 분리됐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 국산 전전자(全電子) 교환기인 TDX를 개발해 대규모 전화 보급이 가능해졌다. 1996년에는 100명당 전화 보급률이 42.7명으로,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10번째로 TDX 개발에 성공해 미국 영국 등 통신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은 글로벌 기업으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건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었다. 이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꾸라”며 품질 중심의 신경영 선언을 했고, 삼성그룹은 이후 국내 기업들의 혁신을 선두에서 이끌며 글로벌 기업으로 부상했다.
LG그룹은 1995년 ‘LG’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이후 지속적인 성공을 일궜다. 1994년 30조원 수준이던 LG그룹의 매출은 지난해 150조원대가 됐다. GS라는 이름은 2004년 7월 등장했지만 그 뿌리는 LG와 같다.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과 식료품점을 하던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1947년 부산에서 락희화학공업사를 차려 화장품 장사를 했고, 이후 석유화학업에 눈을 돌리면서 회사를 키웠다. 고 허만정 공동창업주 가문과는 60년 이상 동행하다 GS가 2005년 LG에서 계열분리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포니 신화를 썼던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메이저 자동차회사로 성장했다. 현재 세계에서 완성차를 생산하는 국가는 20여개국이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산업을 육성해 독자 모델을 개발·생산하고 수출까지 성공한 유일한 나라다. 현대자동차가 포니 생산을 시작한 지 49년이 지난 현재 한국은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이 됐고, 연간 300만대를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화학공업의 강자 지위를 IT분야가 이어받았다. SK그룹은 정보통신분야를 신성장 사업으로 선정해 CDMA 등 글로벌 기술을 선도했다. 네이버 다음카카오 같은 신생 IT 기반 기업이 성장하며 IT 강국 코리아를 선도하고 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