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노루페인트·건설화학공업, 내실 경영·겸손함 '닮은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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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기업'의 도전과 열정 (5·끝)
노루 창업주 "사옥은 사치…제조업은 공장만 중요"
건설화학공업 창업주, 20년간 작업현장서 숙식
노루 창업주 "사옥은 사치…제조업은 공장만 중요"
건설화학공업 창업주, 20년간 작업현장서 숙식
‘해방둥이 기업’ 노루페인트와 건설화학공업 창업주의 경영철학은 닮은 점이 많다. 내실과 신용을 중시했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도 갖추고 있었다.
“기업은 국가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느냐에 의의를 둬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인은 국가 경제 부흥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제조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제조업의 생명은 제품 품질이다. 비싼 값을 하는 상품은 시장경쟁에서 질 리 없다.” 노루페인트의 이념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다. 국내 최초의 페인트 수출, 국내 최초의 미연방도료 생산, KS마크 획득, 중국 쯔진청(紫禁城) 도장 등을 통해 이 이념을 실현했다.
고(故) 한정대 노루페인트 창업주가 가장 싫어한 건 ‘문어발식 경영’이었다. 그는 “이 사업, 저 사업에 손을 뻗기보다는 전문기업으로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각은 노루가 70년간 페인트 관련 외길만 걸어온 바탕이 됐다.
제조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장과 설비라는 신념도 강했다. 한 창업주는 “사옥은 나들이옷과 같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렇다 할 사옥 없이 공장만 6곳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6·25전쟁 당시 거래처 빚을 갚기 위해 피란을 미루고 업체를 찾아다니는 바람에 지인들이 “일단 피란부터 가라”며 말리기도 했다.
●공장에서 살았던 창업주 부부
고 황학구 건설화학공업 창업주는 부산 초량동 남선도료상회 시절부터 부인 안채임 여사와 사업장에서 살았다. 가야공장을 지을 때 50㎡(약 15평) 주택도 함께 지었다. 부부가 거주할 사택이었다. 1971년까지 20년 이상 작업현장 한복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부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오전 4시 반에 일어나 공장을 돌며 부서진 상자를 줍고, 고장난 부품을 고쳤다. 명령하고 군림하는 오너가 아니라 근로자들과 현장에서 함께한 기업인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한결같은 내조로 회사 성장에 기여한 안 여사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과묵하지만 속정 깊은 그는 ‘건설화학의 어머니’로 통했다. 여름이면 수박을 얼음에 재 공장 직원에게 먹였고, 손수 빚은 막걸리를 돌렸다. 창립기념일엔 새벽부터 돼지고기를 삶고 시루떡을 쪄 퇴근길 회사 문앞에서 “약소하지만 가족과 먹으라”며 나눠줬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기업은 국가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느냐에 의의를 둬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인은 국가 경제 부흥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제조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제조업의 생명은 제품 품질이다. 비싼 값을 하는 상품은 시장경쟁에서 질 리 없다.” 노루페인트의 이념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다. 국내 최초의 페인트 수출, 국내 최초의 미연방도료 생산, KS마크 획득, 중국 쯔진청(紫禁城) 도장 등을 통해 이 이념을 실현했다.
고(故) 한정대 노루페인트 창업주가 가장 싫어한 건 ‘문어발식 경영’이었다. 그는 “이 사업, 저 사업에 손을 뻗기보다는 전문기업으로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각은 노루가 70년간 페인트 관련 외길만 걸어온 바탕이 됐다.
제조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장과 설비라는 신념도 강했다. 한 창업주는 “사옥은 나들이옷과 같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렇다 할 사옥 없이 공장만 6곳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6·25전쟁 당시 거래처 빚을 갚기 위해 피란을 미루고 업체를 찾아다니는 바람에 지인들이 “일단 피란부터 가라”며 말리기도 했다.
●공장에서 살았던 창업주 부부
고 황학구 건설화학공업 창업주는 부산 초량동 남선도료상회 시절부터 부인 안채임 여사와 사업장에서 살았다. 가야공장을 지을 때 50㎡(약 15평) 주택도 함께 지었다. 부부가 거주할 사택이었다. 1971년까지 20년 이상 작업현장 한복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부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오전 4시 반에 일어나 공장을 돌며 부서진 상자를 줍고, 고장난 부품을 고쳤다. 명령하고 군림하는 오너가 아니라 근로자들과 현장에서 함께한 기업인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한결같은 내조로 회사 성장에 기여한 안 여사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과묵하지만 속정 깊은 그는 ‘건설화학의 어머니’로 통했다. 여름이면 수박을 얼음에 재 공장 직원에게 먹였고, 손수 빚은 막걸리를 돌렸다. 창립기념일엔 새벽부터 돼지고기를 삶고 시루떡을 쪄 퇴근길 회사 문앞에서 “약소하지만 가족과 먹으라”며 나눠줬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