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세금으로 선심 쓰는 생활임금, 근로자 위화감만 키운다
에드워드 라지어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의 지난 6월22일자 월스트리트저널 기고 ‘왜 경제회복이 더딘가(Why the Recovery Still Limps Along)’는 2000년부터 올 3월까지 미국 각 주(州)의 고용률과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비교분석한 결과를 보여준다. 노조 회비를 강요할 수 없도록 하는 근로권법(미국 22개주가 이 법을 갖고 있다)이 존재하고 동시에 미국 최저임금 평균보다 낮은 임금을 최저임금으로 정한 주가 평균 고용률이 2배 이상 높은 반면, 최저임금이 평균보다 높은 미시간주 등 5개 중 4개주의 고용률이 최저를 기록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 5~20%의 세율 중에 낮은 쪽의 주 GDP가 약 5.5배 빠르게 증가했다. 이런 결과는 아서 래퍼 등 3인의 2014년 보고서 ‘부자 주, 가난한 주’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높이고, 세금을 올리면 고용률은 떨어지고 경제성장률은 낮아진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법률에 임금을 정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시장에 맡기는 것이 답이라는 것이 요지다.

2016년 최저임금(6030원)이 결정됐다. 그런데 또 하나의 최저임금을 정하는 ‘최저임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지난 4월 말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개정안의 내용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근로자에게 ‘최저임금 이상의 적정한 임금’의 보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이상의 적정한 임금’은 흔히 ‘생활임금’이라 불리는 것이다.
[뉴스의 맥] 세금으로 선심 쓰는 생활임금, 근로자 위화감만 키운다
근로자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도 생활이 안 되는 상황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미 전국 18개 지자체가 법 이전에 생활임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 근로자는 환영 일색이다. 최저임금보다 20% 정도 많아 근로자가 느끼는 정서적 만족감도 높다고 한다. 이처럼 근로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준다는 데 딴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과연 환영만 할 일인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법안의 의미는 공공부문의 근로자는 생활임금을 받고 민간기업의 근로자는 여전히 최저임금을 받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최저임금이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니, 최저임금 제도를 이원화하는 것이다. 이런 정책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원화된 최저임금 제도

생활임금이란 공공부문 근로자의 최저임금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공공부문 근로자와 민간근로자 간 임금의 격차로 사회적 위화감이 초래된다. 국가와 지자체에 근무하는 근로자는 생활임금을 받는데, 민간기업 근로자에겐 최저임금만이 보장된다. 이는 현대판 관존민비(官尊民卑)다. 허드렛일을 하더라도 정부기관이나 지자체에 근무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둘째, 생활임금의 확대 시행은 결국 최저임금 인상에 다름 아니다. 공공부문에서의 임금 인상은 민간기업에도 파급된다. 일단 공공부문에서 시행한 뒤 공기업에, 나아가 민간에도 제도 도입·시행을 압박하는 순서를 밟을 것이다. 기업이 이를 수용하면 생활임금은 최저임금 인상과 동일한 효과를 낸다. 지금도 공공연히 “생활임금제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하려면 민간으로의 확산이 관건”이라고 한다. 민간부문에서의 최저임금 인상은 뻔한 것이다.

○非보호 근로자의 희생을 기반

셋째, 최저임금 인상은 전체 실업률을 크게 증가시킨다. 앞에서 말한 라지어 교수의 연구 외에도 최저임금 인상이 실업률을 높인다는 실증적인 연구 결과는 많다. 생활임금으로 보호받는 근로자의 늘어난 소득은 고용되지 못한 사람의 희생에 바탕을 둔다. 생활임금을 지급한다고 해서 정부나 지자체의 업무 품질이나 능률이 갑자기 오르는 것을 기대할 수 없고 조세 수입이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미리 책정된 인건비를 어떻게 배분하는가의 문제다. 똑같은 파이를 몇 명은 조금 더 먹을 수 있지만 한 조각도 못 먹는 사람은 점점 더 늘어난다.

정치인들은 고용된 사람들만 인터뷰하고, 그들은 언론에도 노출되며 생활이 나아졌다고 말할 것이다. 정치인은 이를 자신의 유능함 때문으로 포장해 광고하고 홍보한다. 그러나 고용되지 못한 다수의 얼굴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절망적인 환경이 된다. 예컨대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아파트 경비원을 줄이거나 CCTV로 대체한다. 가계소득은 늘어나지 않았는데, 비용은 늘어난다면 그 원인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사용자에 대한 분노를 이용해 제정한 법률이지만 결국은 근로자끼리의 투쟁을 심화시킬 뿐이다.

넷째, 생활임금의 재원은 국민 또는 주민의 세금이다.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지자체장이나 이 법안을 만든 의원들은 자기 돈을 쓰지 않는다.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것이다. 현재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지자체의 재정자립도가 17~30% 정도에 불과한 곳이 많고, 적자가 누적돼 파산 지경에 이른 지자체도 다수 있다. 결국은 중앙정부로부터 지원받고 국민의 세금으로 보전해야 한다. 근로자 편에 서서 눈물을 흘리는 척하지만 사실은 국가의 돈, 국민의 세금으로 선심 쓰고 인기를 누리려는 얄팍한 이기주의가 아닌가.

다섯째, 최저임금 등의 문제는 개개인의 심리와도 관련이 크다. 최저임금이 근로자의 기본 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할 때 개개인의 좌절감이 모이면 결국 국가적인 불행으로 이어지고 경제가 성장하기 더 어려워진다. 이 점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정치적 地代 추구 술수일 수도

이는 기본적으로 국민 간 불평등의 문제로, 이와 같은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정부 노동자 고용주 등 초국가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저임금과 다른 개념인 생활임금 개념을 설정하고 생활임금을 별도의 그룹에만 부여하는 것은 근로자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개인의 좌절감을 심화한다. 공공기관은 민간 영역보다 그 수가 미미하므로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는 사람은 적고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많을 수밖에 없다.

결국 생활임금 정책으로 억울한 사람이 많이 생긴다. 억울한 사람은 생활임금 확대를 바라고 이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를 선호한다. 후보는 억울함을 느끼는 대다수 근로자의 분노를 이끌어내 욕망을 달성하고, 이것이 성공한 후에는 온갖 지대(地代)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

최준선 <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