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제조와 판매를 하겠다고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등록한 업체 수가 8000개에 육박하고 있다. 올 들어서는 매달 평균 190개 업체가 화장품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아모레퍼시픽 산성앨엔에스 등이 ‘대박’을 터뜨리자 중국 시장을 겨냥해 불나방처럼 화장품사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화장품사업이 높은 관심을 받게 된 지 2년이 채 안 돼 레드오션으로 변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부 기업의 주가는 급락하며 이 같은 예측에 힘을 보태고 있다. 업계에선 “가장 뜨거울 때가 가장 위기일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연내 화장품업체 9000개 돌파

지난 18일까지 식약처에 국내 화장품 제조·판매업체로 등록한 회사는 모두 7898개였다. 2012년 1438개에 비해 다섯 배로 증가했다. 올 들어 18일까지 새로 화장품사업 등록을 한 업체만 1531개에 달했다. 한 달에 200개 가까이 생기며 작년 한 해 동안 설립된 화장품업체 수 1425개를 넘어섰다. 이런 속도라면 이달 안에 8000개를 넘고, 연말에 9000개를 돌파할 전망이다.

화장품업체가 급증한 계기는 아모레퍼시픽과 산성앨엔에스 등의 성공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중국에서 ‘K뷰티’ 열풍을 일으켰고, 산성앨엔에스는 업종을 전환해 급성장했다. 손성민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 기획조사팀 연구원은 “골판지 회사였던 산성앨엔에스 등 화장품과 관련 없던 업체들이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화장품시장에 진출하는 업체가 급증했다”고 말했다.

제약사, 엔터테인먼트업체, 제조업체까지 다양하다. 시계업체 로만손, 도자기업체 행남자기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삼익악기도 화장품업체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폐쇄회로TV(CCTV) 카메라 제조사 휴바이론, 홈네트워크 전문업체 르네코 등도 화장품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미 레드오션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경쟁 심화 등으로 신생 업체들의 수익이 악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비슷한 전략과 상품으로 경쟁하는 업체가 무더기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년 중국에서 7000여만장의 ‘리더스마스크팩’을 판매한 산성앨엔에스 주가는 지난 6월 12만4200원까지 치솟았지만 19일 5만4800원으로 급락했다. 두 달 만에 반토막이 났다. 2분기 실적이 시장 예상을 밑돌았기 때문이다. 매출은 527억원으로 시장 추정치보다 7.5%, 영업이익은 121억원으로 28.8% 낮았다.

엔프라니의 최대주주인 한국주철관 주가도 지난 5월 2만4000원대에서 1만1000원대로 떨어졌다. 올해 상장을 계획 중인 네이처리퍼블릭 등은 상장 연기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별화된 전략·기술 필요

중국 시장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정부가 ‘다이궁(보따리상)’ 규제를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화장품업체들이 중국 정부로부터 제품 판매에 필요한 위생허가를 받으려면 1년이 넘게 걸린다. 이 때문에 국내 화장품업체 중 위생 허가를 받는 곳은 연간 150여곳에 불과하다.

장준기 대한화장품협회 상무는 “많은 신규 업체가 위생허가를 받지 못한 채 다이궁을 통해 중국으로 제품을 들여보냈다”며 “하지만 규제가 강화되면서 중국 진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정부는 6월부터 다이궁이 한국 제품을 들여오는 것을 밀수로 보고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K뷰티 열풍’이 거세지자 한국산 유입을 막고 자국 내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서다.

다이궁 규제는 제조는 하지 않고 판매만 하는 업체들에 직접적인 타격이 되고 있다. 올 들어 화장품사업 등록업체 중 제조를 하겠다는 업체는 17.3%인 266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에 제조를 맡기고 브랜드만 내걸고 판매하고 있다.

무더기 화장품시장 진출이 K뷰티 열풍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천연화장품 업체 아이소이의 이진민 대표는 “중국인들이 한국 화장품에 대한 기대를 갖고 제품을 구매했다가 실망하면 한국산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신규 업체 간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손 연구원은 “아모레퍼시픽 등 대기업 유명 제품만 찾는 중국인이 늘어 신규 업체들의 설 자리는 더 좁아지고 있다”며 “생존을 위해선 차별화된 기술과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