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이거, 만날 다른 사람 사진만 찍다가 내가 사진을 찍히니 영 어색하네요.”

원로 다큐멘터리 사진가 윤주영 전 문화공보부 장관(87·사진)은 지난 20일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광화문빌딩에 있는 조우회(조선일보 사우회) 사무실에서 인터뷰 사진을 촬영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의 음성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힘 있고 또렷했다. 안경을 끼지 않은 채 맨눈으로 책 속 작은 글씨를 읽을 정도로 시력도 좋았다.

22일부터 10월3일까지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사진전을 여는 윤씨는 “나는 사진가고, 그 수식어를 제일 좋아한다”고 여러 번 반복했다. 30여 차례 개인전을 열고, 20권의 사진집을 발간한 직업 사진가인 그가 언뜻 너무나도 당연히 들릴 말을 그처럼 강조한 것은 자신의 ‘과거’ 때문이다.

교수와 언론인, 장관 등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누구든 감탄할 만한 남다른 이력. 나이 쉰한 살에 늦깎이로 사진에 입문해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계에서 일가를 이룬 능력. 하지만 윤씨는 “지나간 일들로 지금의 나를 평가받고 싶지 않다”며 “난 나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겸양이 아닌 단호함이 훨씬 강하게 배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숨가쁘게 달렸던 ‘인생 1막’

윤씨의 인생 전반기는 숨 돌릴 틈 없을 정도로 바쁘고 화려했다. 1928년 개성 인근의 경기 장단군에서 태어난 그는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스물일곱 살에 중앙대 정치학과 교수가 됐다. “그때는 6·25전쟁 직후라 워낙 혼란스러워 지식인이 별로 없었어요. 대학을 졸업했거나 석사학위가 있으면 곧바로 대학교수로 채용하던 시기죠.”

서른세 살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전격 스카우트된 것은 윤씨의 인생을 크게 바꿨다. 기자 경력이 전혀 없던 그가 갑자기 편집국장이 되자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의 반발이 매우 거셌다. 윤씨는 편집국 업무를 익히기 위해 국장석 옆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한 달 동안 퇴근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얼떨떨하고 대단한 일입니다. 기자 출신이 아닌 사람을 편집국장으로 앉힌다는 것은 상상 못할 결정이니까요. 아마 외부의 시선으로 개혁하고 싶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조선일보 사내에서는 “윤 국장은 찬물에 들어가도 몸이 뜨거워 김이 날 사람”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2년간의 언론인 생활을 마친 뒤 서른다섯 살에 정계로 나갔다. 이번에도 영입이었다. 주(駐)칠레대사와 문화공보부 장관, 국회의원 등 여러 직책을 거쳤다. 특히 문공부 장관 시절엔 매일 밤 늦게까지 일하느라 문공부 건물의 불이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한 번 뭔가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입니다. 맹탕으로 하는 걸 싫어해요. 그런데 정작 사진가가 되기 전 경력 중에서 처음부터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일들이었죠.”

윤씨는 1979년 봄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신 돌아가지 않았다. ‘백수’가 되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사진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내가 진정 마음으로부터 원해서 한 일이었기에 더욱 설레고 특별했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늙어가는 마당에 무슨 짓이냐”고 비웃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나갔다.

메시지 없으면 사진 아니다

[人사이드 人터뷰] "찰칵! 사진 한 장엔 활자로 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죠"
윤씨는 인물 사진을 찍는다. 또 언제나 흑백으로만 인화한다. 그는 “사진의 본질은 어떤 사실을 누군가에게 영상이라는 수단으로 알려주는 것”이라며 “인물사진 한 장 속에는 활자로는 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또 “흑백 사진은 컬러와는 다른 중후함과 강렬한 대비감이 있다”며 “맨 처음 사진 촬영을 시작했을 땐 컬러 인화 기술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지만 지금은 일부러 흑백 인화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상의 수많은 인물을 찾으려 지구촌 곳곳을 다녔다. 국내는 물론 중남미와 네팔, 인도, 파키스탄, 터키, 그리스, 이집트 등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이 수십만 장에 달한다. 어머니와 아이들, 해외동포, 광부, 인간문화재 등 인물 유형도 다채롭다. “사진은 마음을 담아내는 과정이에요. 어느 나라를 가든 언어를 뛰어넘는 감동이 있죠.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실은 그 안엔 누구나 감동받을 만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메시지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고민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는 사진을 전하려 노력하죠.”

윤씨는 사진 촬영시 연출이나 편집을 하지 않는다. 담백하고 따뜻하지만, 직선적 정공법이 느껴진다. 인물에 초점을 맞추되 지나치게 클로즈업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을 찍는 사람과 말을 별로 안 한다”고 했다. “사진을 찍으러 갈 땐 이미 머릿속에 어떻게 구성할지 큰 그림은 그려져 있어요. 그렇지만 사진을 찍을 때 원하는 모습이 나오도록 유도한다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그저 사진 좀 찍어도 괜찮겠냐고 허락을 구할 뿐입니다. 셔터를 누르는 ‘결정적 순간’이요? 그걸 어떻게 말로 할 수 있나요.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죠.”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을 ‘사진작가’라 부르는 걸 싫어한다. “난 사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에요. 존재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일을 하죠. 시를 쓰는 사람더러 시인이라고 하지 ‘시 작가’라 합니까? 소설 쓰는 사람에게 소설가라 하지 ‘소설 작가’라 합니까?”

윤씨의 이 같은 노력은 1990년 내놓은 사진집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일본의 저명한 사진상인 ‘이나노부오상’을 받으면서 빛을 발했다. 그 후 한국현대사진문화상, 백오사진문화상 등을 수상하며 국내 대표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됐다.

건강 유지 비결은 ‘일하는 것’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일하는 윤씨의 건강 유지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이 물음에 “건강 관리를 위해 따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일을 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답했다. “늙을수록 무엇이든 일을 항상 손에서 놓으면 안 됩니다. 일이 없으면 병이 나게 돼 있어요. 사진 일이 좋은 게 평생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도 오전 9시부터 새벽 2~3시까지 일합니다.”

윤씨는 “요즘도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반성한다”며 “나이가 들다 보니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여태까지는 ‘내가 내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앞으로는 좀 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깃든 사진을 많이 찍고 싶다”며 “창조적이면서도 배려심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이가 들었다 해서 사진 세계가 확 달라지거나 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계속 탐구해야 합니다. 난 아직도 멀었어요.”

■ 직업 사진가 되려면
자신만의 개성 담긴 포트폴리오 만들어야

직업 사진가의 분야는 크게 순수예술과 다큐멘터리, 상업사진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순수예술 사진가는 화가와 성격이 비슷하다. 실내 스튜디오나 외부 촬영을 통해 예술 작품으로서의 사진 촬영을 중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사진을 찍는 이가 주제 의식을 갖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찾아 찍는 것이다. 기록과 메시지 전달을 우선시한다.

상업사진 사진가는 광고 또는 홍보용 사진을 촬영하는 업무를 한다. 이 경우엔 철저히 의뢰인의 요구에 맞추고, 서로 긴밀히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

직업 사진가가 되기 위한 정해진 경로는 없다. 어떤 전공을 했는지 또한 상관없다. 물론 대학 또는 대학원, 각종 사설 학원이나 사회교육원 등 사진 관련 학과나 수업을 개설한 다양한 교육기관이 있다. 하지만 이런 수업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실력 있는 사진가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특히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한 뒤 고성능 카메라를 비교적 쉽게 다룰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독학으로 사진을 익힌 사람들 중에서도 직업 사진가가 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직업 사진가가 되려면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사진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순수예술이나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꿈꾼다면 사진 전시 갤러리나 사진집 출판사와 꾸준히 접촉해 길을 뚫어야 한다. 작품 검증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입소문이 퍼지면서 작품 가치와 사진가의 몸값이 함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